친일작가 유치진과 가상인터뷰(2)세째 날 : 데면데면
하아무/소설가
인터뷰 마지막 날이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약속시간에 먼저 나가 앉아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인터뷰를 이쯤에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당연히 왜 그러냐고 물었고, 목소리는 자신에게 그다지 이롭지 못한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하늘나라에서 천도복숭아를 먹고 사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가,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몰랐을 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떻든 나는 사전에 그가 제시한 조건을 만족시켰음을, 다시 말해 객관적 자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음을 들먹이며 절대 불가함을 강조했다. 힘들게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인터뷰 자체도 3분의 2 가량이나 진행된 마당에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하늘나라 당국에 어떻게 항의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10여 분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무 | 어서 오십시오.
유치진 | 휴우-, 미리 예상은 했습니다만 역시나 쉽지 않군요.
하아무 | 그러시겠지만, 정리할 건 정리하고 규명할 건 규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세 번째로, 후기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해방 후부터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집니다. 이 시기는 따로 정리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희비가 엇갈린 때였지요.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그리고 독재정권과 유신체제 등 우리 민족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 연극계는 어땠는지요?
유치진 | 끌려 다녀야만 했던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당연히 기쁘고 감개무량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분열 등 혼란으로 인해 연극계도 거기에 휘말리면서 혼란스러웠어요. 해방 직후에는 좌익 연극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곧 미군정의 좌익 연극인 검거가 실시되면서 그들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아무 | 극예술협회(극협)가 발족된 게 1947년이었지요?
유치진 | 예. 우리가 1930년대에 결성했던 극예술연구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극을 수립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살기도 빠듯한 시절에 극단 운영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에 비해 상업극과 번역극 공연이 많았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이 되었지만 문화정책은 기대할 수가 없었구요, 곧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극계도 새롭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아무 | 오랫동안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친 후 가장 시급한 것이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는 것이었을 텐데요.
유치진 | 그랬지요.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해방을 우리는 전혀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맞아야만 했습니다. 해방을 맞았지만 솔직히 당황스럽더군요. 그동안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는 희곡을 쓰고 무대에 올린 연극 장면들이 고통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게 그 작품들, <흑룡강>과 <북진대>를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이미 한 일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 상황에서 제가 어떡하겠습니까. 달리 민족에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민족주의에 더 매달리게 되더군요. 친일행위를 비롯하여 구질서의 여러 형태의 삶을 경험했기에, 해방을 맞이하는 부분에서도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이지요.
하아무 | 그래서 나온 작품이 <조국>이었지요?
유치진 | 예, 그렇습니다. 일종의 속죄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것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자연스레 일제 때 다루지 못했던 독립운동과 일제에 저항하는 사건들을 소재를 많이 다루었거든요. <조국>도 그래서 나온 작품입니다. 독립운동과 효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이 결국 나라의 독립이 더 중요함을 자각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아무 | 예, 이 작품은 <원술랑>과 함께 교과서에도 실렸던 작품이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기억을 하고 있을 텐데요, 여기에 일본 헌병이 함께 만세를 부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유치진 | 그렇습니다. 비록 일본의 군인이지만 조선인들의 생각과 의지에 감복해 따라서 만세를 부르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하아무 | 그런데 일본 군인이 감동을 해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 너무 현실성이 없는 얘기 아닌가요? 사실 굉장히 희화적인 내용인데, “어떻게 이런 작품이 그동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유치진 | 허허, 글쎄요. 그건 뭐 모르긴 몰라도 작품에 민족주의 의식이 보다 확고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하아무 | 그건 올바른 민족주의 의식이 아니라 억지로 의도된 것이고 전도된 가치에 불과한 것이지요.
유치진 | 뭐랄까, 그만큼 생각이 앞섰다고 할까…….
하아무 | 후기 작품들 가운데 또 눈에 띄는 것이 당시 독재권력에 밀착된 일련의 활동과 반공의식 표현입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나도 인간이 되련다>가 대표적인데요.
유치진 |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공산주의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그들의 인간성 말살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쓴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이 자유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공산주의와 인연을 끊고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끝내 죽고 말지요. 글쎄, 이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현재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탈북행렬을 그때 나름대로 예견했다고나 할까.
하아무 | 하지만 해방 후 선생의 행적이나 작품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물론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비판의 대부분은 중기 일제의 정책에 맞춘 국민연극 활동이 대부분이었고, 해방 후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해방 후 유치진은 친일의 대상을 이승만 정권으로 바꾸었을 뿐 같은 행태로 연극계 내에서 권력을 획득한다. 이러한 정권과의 밀착은 교과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유치진의 희곡 두 편이 실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치진 | 허허, 글쎄올시다. 정권과의 밀착이나 무슨 연극계 권력 운운하는 것을 나는 인정하기 어렵군요. 나는 다만 연극계의 앞날만을 평생 생각해왔던 사람이고 연극 발전을 위해 한 일일 뿐입니다. 비판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쪽에서만 판단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세요.
하아무 |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서요. 제가 그에 대한 자료와 함께 말씀드리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군요. 사실 지금도 선생에 대한 비판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선생에 대한 비판은 곧 ‘유치진 인맥’과 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힘들다는 거죠. 선생은 60, 70년대에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드라마센터를 건립해 후진을 양성했는데, 그 인맥이 현재 우리나라 희곡계와 연극계를 휘어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연극행정 전반에 대한 딴지 걸기’로 인식돼 시작과 함께 온통 벌집을 쑤셔놓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는 게 연구자들의 생각인 거죠.
유치진 | 허허, 아무리 내 인맥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손 치더라도 정당한 비판이면 왜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한단 말이요.
하아무 | 그런 용기 있는 연구자가 2003년에 나왔군요. 당시 문학과 비평 연구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김성현은 <해방 후 유치진의 연극이론 전개 과정과 남한 극계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을 개괄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아직까지도 희곡작가 하면 대개 유치진만 떠올리는데, 이는 정치권력과의 밀착관계 때문입니다. 해방기에 좌익극과 상업적 대중극을 정치권력과의 밀착관계로 제압하고 자신의 연극관에 맞는 것만 살려놓습니다. 이는 자연스레 우익연극의 세력화를 가능하게 했는데, 1950년 국립극장의 설립 역시 선생이 이끄는 연극계 우익 헤게모니 획득의 가시적 성과죠. 그 후 1973년 제3차 교육과정 개편 때 최초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희곡이 실리게 되었는데, 선생의 희곡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와 <조국> 등 두 편이 실리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를 김성현은 “연극계 원로이자 핵심권력으로서 유치진의 위치가 공고해졌다는 개인사적 맥락과 유신체제가 강화되면서 교과서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데올로기 교화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이 교차”한 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문학 창작자로서보다 연극행정가로 과도한 활동을 하고 권력과 밀착관계를 형성하다보니 “해방기 연극계에서 유치진이 적지 않은 창작물의 부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에 준하는 문제작을 창작해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대표작은 거의 초기 작품들이지요?
유치진 | 하지만 나는 일제 때와는 달라진 연극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한 것일 뿐이에요.
하아무 | 선생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파장은 당대의 연극계뿐만 아니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당대에 바로잡혔어야 할 문제들, 친일작품이나 정치권력과의 밀착 등 벌써 50년 넘는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 그 뿌리가 너무 깊고 넓게 박혀 있어 웬만한 수술로는 치료가 어려울 지경인 것이지요.
유치진 | 그 문제를 지금 나보고 다 떠안고 해결하란 말인가요?
하아무 | 그렇진 않습니다. 그것을 선생 혼자만의 문제라고 주장하지도, 선생이 모두 책임지라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다만 그 한 가운데 항상 선생이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상기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문제의 경우, 비극적이긴 하지만 전체 우리 근대연극사의 문제임이 명백합니다. 이재명은 “유치진의 연극은 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과 같이 친일의 테두리에서 성장한 조국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고 근대연극사의 불행과 함께 한다”면서, “해방된 후 친일청산이 유야무야되어 영영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문화를 생산하는데 실패했던 우리의 과제와도 닿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대에 청산하지 못한 그 문제를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속죄해야 합니다. 지금 털고 가지 않으면 영영 더 기회는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은 선생을 욕보이려고 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무조건 덮어 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치진 |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것 아니겠소.
하아무 | 예, 부디 올바른 비판과 평가가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라구요, 동시에 해방기에 제거되고 월북해버린 월북극작가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묻혀버린 박용호, 송영, 임선규, 함세덕, 남궁만 등에 대한 발굴작업과 함께 평가로 균형잡힌 희곡계와 연극계 역사가 잡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없으신지요.
유치진 | 있습니다. 그래요, 일제나 독재정권의 방침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일해온 적이 있음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문화권력을 가졌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무리는 아닐 테지요. 하지만 나는 그걸 연극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내 의도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연극계에 헌신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문제들 아니겠소? 친일이든 뭐든 이제 이쯤에서 내버려 두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오. 생각해 보시오. 여기에서 나와 내 동생 치환이는 매일 통곡을 하고 있다오. 나 혼자도 힘겨울 상황인데, 동생마저 함께 친일 혐의로 힘겨워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오.
하아무 | 그러고 보니 청마 유치환 선생이 쓴 시가 생각나는군요. 박태일 씨가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성전이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한 바 있는 <북두성>이라는 시였지요?
“밤은
얼음같이 차고
상아(象牙)같이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亞細亞)의 산맥(山脈) 넘어서
동방(東方)의 새벽을 이르키다”
유치진 | 듣고 있기 괴롭군요. 정말이지 내가 경험해본 문화권력은 달콤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상한 것이었소.
하아무 | 하지만 청마 선생보다는 선생님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지요. 1941년 8월 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란 글에서 선생은 감격과 감분(感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청년들에게 학병을 권유하지 않았습니까. “황군은 천지의 정의와 인류의 공도(公道)를 지키는 유일한 실력이다. 황군의 일원이 되어 세계의 사악을 걷어치워 버리고 도의적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성전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반도 청년으로서 이에 지나는 영광이 있으랴” 라고 쓰셨지요. 게다가 1943년 6월호 국민문학에 <사상전의 첨병>이라는 제목으로 “전쟁국의 문학자가 전쟁에 승리해야 할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전쟁이 제거된 평화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평론가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의 죄악인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정말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치진 | 여하튼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저의 허물을 사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월북극작가들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우리 연극사를 풍요롭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빕니다.
하아무 | 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다 되었군요. 아쉽지만 이만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장시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비록 가상 인터뷰였지만 선생의 말이 모두 진심이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유치진 | 네, 이렇게 먼 하늘나라까지 찾아와 주셔서 저 역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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