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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 유치진과의 가상 인터뷰 (1) 첫 날 : 화기애애

하아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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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몹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우선 제15회 전국민족문학인 경남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공식 인터뷰 요청을 하는 것부터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절차도 복잡했다. 전화나 팩시밀리, 우편, 이메일 등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해온 방법과도 너무 달라 그것을 알아내는 데만도 꼬박 1시간 11분이 걸렸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인터뷰를 시도할 가엾은 사람들을 위해 그 방법을 덧붙여 둔다면, 인터뷰를 요청하는 공문의 상단 가운데에 이메일 주소
‘ecotopia1004-8080@skymail.net’를 장평이나 자간 없이 11포인트로 표기하고, 하단 한가운데에는 10원짜리 해와 달이 함께 나온 우표를 붙여서 팩스번호 0000-0000-0000으로 보내야 한다. 주의할 것은 이메일 주소가 정확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장평이나 자간, 포인트가 정확해야 하며 우표도 해와 달이 모두 나오지 않은 것을 사용하면 0.1초도 안 돼 반송된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만들어낸 이상향 에코토피아(ecotopia)를 이용한 이메일 주소에서 ‘1004-8080’이 ‘천사가 팔랑팔랑’ 공문을 전달한다는 뜻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팩스번호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는데,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전혀 없는 듯하면서도 존재하는 세상을 의미한다는 거였다.)

수차례의 전송과 반송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성공했지만 정확히 49초 만에 돌아온 답변은 ‘불가(不可)’였다. ‘하늘나라’ 당국에서는 인간들의 무절제한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이나 불신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간과 접촉하기를 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치진 선생 본인이 극구 고사하고 있다는 거였다. 답답했지만 그 정도에서 순순히 물러설 수도 없었다. 열 번째 ‘불가’ 통보를 받고 다시 공문을 보냈을 때였다. 급기야 ‘하늘나라’ 당국에서 유치진 선생과 직접 전화를 통해 그를 설득해 보라고 권유해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11월 19일 새벽 3시 49분 경에 내 꿈길을 타고 전화가 왔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생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친일문제 이야기 할라고?” 가위에 눌리듯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손짓 발짓 섞어 생각나는 대로 외쳤는데, 그 왜 꿈속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 있지 않은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텔레파시로 내 생각이 전달되는 것 말이다. 그러자 선생은 미덥지 않다는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뭐라꼬? 내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니 맘대로 쓸끼라는 말이가? 니가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꼬?” 이번에도 내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생각은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인터뷰에 응해 달라꼬?” 그리고 선생은 한참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꿈속이니까 실제 시간은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선생은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정확한 사실과 자료, 연구성과에 기초해서 질문하고 내 답변을 충실히 반영할 것, 이 조건이 지켜지지 않을 땐 인터뷰고 뭐고 무효!” 선생의 어조는 매우 강경했고, 나는 당장 오른손을 선서하듯 들고 명쾌하게 외쳤다. “옛 썰!”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새벽부터 내리 사흘을 만나 4시간씩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날 : 화기애애

하아무 | 선생님, 반갑습니다. 드디어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유치진 | 흐음, 반갑소. 우선 차부터 한 잔 합시다. (허공에 대고) 여게 천도복숭아차 두 잔 주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누가 가져다준 것도 아닌데 마술처럼 차 두 잔이 ‘짠’ 하고 나왔다. 아니, 나왔다기보다 나타났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손잡이 없는 머그컵 모양의 흰 잔에는 아무런 그림도 문양도 없었다.

하아무 | 와, 완전 자동이네요. 이게 그렇게 유명한 천도복숭아로 만든 차인가요?
유치진 | 허허, 그렇긴 하오만 헛된 기대는 하지 마시오.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지상의 인간들이 상상해낸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자, 드시오.

하아무 | 색깔이 없네요. (경망스럽게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신다.) 야, 따뜻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네요. 달착지근한가 하면 어쩌면 풋내도 나는 것 같고 산뜻하고 부드러운 맛도 느껴지고, 뒷맛은 해감내가 나는데 암맛도 어렴풋이 나는 것 같습니다.
유치진 |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일게요. 우리는 그것을 ‘하늘나라 참맛’이라고 하오만, 인간이 만든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오. 표현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입으로 느껴보시오.

하아무 |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이메일 주소에 ‘에코토피아(ecotopia)’란 말이 쓰이고 있던데 칼렌바크가 상상해낸 환경적 이상향과 ‘하늘나라’가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될는지요? 비슷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메일 주소로 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유치진 | (손사래를 치며) 그건 아니라오. 인간들이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에코토피아란 용어를 붙인 것이지. ‘하늘나라’의 체제나 운영방법 등은 비밀인데, 사실상 설명하려고 해도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숨길 필요조차 사실은 없다오. 팩스번호처럼,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거든.

하아무 | 그렇군요. 소쉬르가 그랬던가요? “누구도 명료하게 자기가 의식한 모두를 글로 드러낼 수 없으며 세계를 표상할 수도 없다”는 말.
유치진 | 내가 공부할 때는 없었던 이론이지만, 꽤 재미있더군. “기호는 사물 자체를 지시하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를 대체하여 사물 자체의 부재를 입증한다”고도 했지. ‘하늘나라’라고 하든 ‘에코토피아’라고 하든 언어적 기호를 부여하는 순간, 그 기호에 갇혀 본질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지.

하아무 | 아이쿠, 이거 시작도 하기 전에 제가 곁가지로 빠지게 한 것 같네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한 유인물을 꺼내며) 제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나는 미리 약속한 대로 “정확한 사실과 자료, 연구성과에 기초해서 질문”을 준비했음을 보이기 위해 참고자료를 정리했다. 준비한 유인물은 그 목록이었다. 약속도 약속이었지만 친일행적을 놓고 심심찮게 벌어지는 불필요한 고소∙고발사태를 사전에 피하자는 셈속도 분명 있었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이상우, 《유치진 연구》, 태학사, 1997
윤금선, 《유치진 희곡 연구》, 연극과인간, 2004
윤여탁, <1950년대 희곡의 전개 양상>
임화, <극작가 유치진론>, 동아일보, 1938. 3. 1~2
유민영, 《유치진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65
정형상, 《유치진 연구》, 전남대 석사학위 논문, 1970
서연호, <사실주의와 유치진>, 《한국연극의 현실》, 동화예술, 1974
조성구, 《동랑 유치진 연구》, 단국대 석사학위 논문, 1983
김명호, 《유치진 희곡 <토막> 연구》, 동아대 석사학위 논문, 1983
김옥이, 《유치진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 1984
이희규, 《유치진 희곡 연구》, 전남대 석사학위 논문, 1988
양승국, 《한국근대연극비평사연구》, 태학사, 1996
내가 내민 목록을 훑어본 선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진 | 자, 그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왔는지 한 번 들어볼까요? 그럴 듯하게 목록만 제시하는 건지, 정말 제대로 알고 온 건지.

하아무 | 예, 우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의 생애와 활동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난 후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깊이 있는 얘기를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유치진 | 그러세요.

하아무 | 선생은 1905년 11월 19일 충무에서 8남매 중 큰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동생인 청마 유치환은 우리나라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생명파 시인이구요, 연출가인 아드님이 있었군요. 작년이 탄생 100주년 되는 해였는데, 우리 (사)민족문학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학술회의를 열기도 했었지요.
유치진 | 음, 그 부분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동안 민족문학작가회의 하면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않았고, 나를 위해 그런 행사를 해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 날 “친일 혐의 문학인들에 대해 날선 저주와 증오를 드러내기보다 이해하고 끌어안는 쪽을 택”(조선일보 2005. 10. 10)해주어 매우 뜻깊었던 행사였습니다.

하아무 | 제가 너무 게으르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선생의 생애를 그대로 인용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또다른 유인물을 꺼내 코를 박고 더듬더듬 읽어 내려간다.) 선생은 “1918년 통영보통학교를 마치고 부산 체신기술양성소에서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뒤 통영우체국 사무원으로 근무했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豊山中學)을 거쳐 1931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31년 김진섭·서항석 등의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고 이 단체에서 주관하는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기도 했지요. 1938년 3월 일제의 탄압에 의해 극예술연구회가 해체되자 서항석과 함께 극연좌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압박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1년 만에 해체되었습니다. 1940년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극문화협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이 부분에서 뜸을 들이며 먼저 내용을 확인하고 선생의 얼굴을 잠깐 본 다음 빠르게 읽는다.)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조직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친일극을 공연했습니다.”
유치진 | (손사래를 치며) 아니 아니, 잠깐만. 벌써부터 그 친일 얘기를 꺼내긴가?

하아무 |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이 내용은 브리태니커에 실린 내용을 구어체로만 바꾼 것입니다. 내용은 백과사전에 실린 그대로임을 다시 강조해 말씀드립니다. 당초에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정확한 사실과 자료, 연구성과에 기초”한 것입니다. (유치진 선생이 외면하며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후) 이해가 되셨으면 계속하겠습니다. 선생은 이어서 “8·15해방 이후 잠시 침묵했다가 1947년부터 좌익연극을 반대하는 우익민족극을 주도했으며, 그해 이해랑과 함께 극단 극예술협회를 조직했습니다.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에 취임했고, 6·25전쟁 때는 은거하며 희곡 창작에 전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50~52년 국립극장장, 1958년 국제연극협회 한국본부 위원장, 1959~69년 동국대학교 교수, 1962~65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냈고, 1962년부터 죽을 때까지 드라마 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배우·연출가·극작가 등을 배출하는 데 힘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치진 | (작게 한숨을 흘리며) 백과사전인지 뭔지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건 알고 있소.

하아무 | 다음은 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선생은 “희곡 <토막(土幕)>(문예월간, 1931, 12~1932. 1)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작품이 씌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뉩니다. 초기는 1930년대 중반까지이며,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소>, <마의태자>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중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진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이며,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후기는 해방 이후부터 활동한 시기이며, <조국>, <원술랑>을 비롯해 <자명고>, <별>, <사육신>, <통곡> 등과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습니다.
유치진 | …….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무 | 이희규는 그의 논문에서 “실로 유치진은 한국 연극의 심볼로서 극작가, 연출가, 연극 비평가, 연극 교육가 등 연극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활약했다”고 평가했구요,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유치진이 없었다면 20세기 한국 연극사는 한결 가난해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유민영은 “① 한국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일생을 순수 연극운동에만 몸을 바쳤다는 점, ② 좋은 희곡 작품을 써서 이 땅의 희곡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토착화시켰다는 점, ③ 극예술연구회의 리얼리즘 정신을 한국연극연구소에까지 그대로 이어오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는 점, ④ 국립극장 설치에 많은 역할을 하고 드라마센타 건립이란 대사를 해냈다는 점” 등을 들어 “유치진은 ‘신극의 거목’”이라고 칭찬했고, 윤여탁도 “남한의 희곡사에서 유치진이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누구도 넘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양승국이 “제국의 충성스러운 이데올로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순결한 아나키스트로 농민극을 개척한 1930년대 전반의 작품들로 영원한 청춘을 누릴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유치진 | (문득 고개를 들며) 1930년대 전반의 작품들로? 그럼 그 이후의 작품들은 몽땅 쓰레기라도 된단 말인가?

하아무 | 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구요, 오늘은 선생님의 초기 작품들에 대해 얘기해보죠. 아까 초, 중, 후기로 구분한 방법에 따라서 초기, 즉 1930년대 중반까지인데요, 먼저 선생님이 그 당시의 분위기와 선생님의 활동상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십시오.
유치진 | 1930년대 중반까지라…….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시기였지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점차 강화하고 조직화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보다 가혹한 희생을 강요했으니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조선에 대해 농촌진흥책을 전개하고 내선일체를 강요했어요.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땅을 잃고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연극계는 극단의 이념이나 의식, 활동분야에 의해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신파극이고 극예술연구회-줄여서 ‘극연’이라고 하지요-를 주축으로 한 근대극이 다른 하나입니다. “신파극은 1910년부터 시작된 신파극의 방법을 계승하여 상업주의 연극으로 확대시킨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극연은 1920년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서구의 근대극운동을 표준으로 삼아 이 땅에서도 새로운 근대극을 창조하려고 노력”-김옥이의 논문에도 나오는 얘기지요-했지요.

하아무 | 선생님이 직접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했는데요, 당시 활동하기에 어땠나요.
유치진 | 어려웠지요. 나를 비롯해 10명의 동인들이 활동했는데, 연극행위를 통해 경색된 현실을 고발하고 그 고발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하아무 | 초기 대표작으로는 <토막>과 <소>,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그리고 <마의태자> 등을 들 수 있을 텐데요.
유치진 | 그렇습니다. <마의태자>는 좀 다르긴 합니다만, 어쨌든 초기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내가 연극을 선택한 이유가 “우리 민족의 고통스러운 삶에 중점을 두어 민족을 계몽하고 일제에의 저항의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연극의 사회적 관심을 비극적 상황의 노출 내지 폭로라고 했을 때, 그것은 권력, 전쟁, 빈곤과 기아, 인권, 인종, 종교적 갈등에 의해 개인이나 집단, 사회, 그리고 인류 등이 위협 당하고 파괴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제가 문학사상 8호에 <못다부른 노래의 아쉬움>이란 글에서 쓴 바대로 “<토막>이 성공을 거두었던 까닭의 하나는 당시에 이 어둡고 어려운 현실을 정면으로 부딪쳐 다루었던 데 있었습니다. 즉 나는 이 작품에서 1930년대 우리 농촌의 비참과 모순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다루었는데 <토막>이 이만큼이라도 관객의 마음을 포착한 것은 작품이 반드시 예술적인 성공을 했다기보다도 자기 표현에 굶주린 우리 관중에게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 주었던 것이 이 연극을 성공시킨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아무 | 저는 선생님이 1934년에 쓴 최초 장막 희곡 <소>가 대표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토막>에서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구체화해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토막>에서 경선은 추운 겨울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이농민의 슬픔과 고통을 나타내면서도 외적인 힘에 쉽사리 굴복하고 말잖아요. 이런 장면에서 닥쳐온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웠거든요. 하지만 <소>에서는 좀더 적극적인 저항의지를 표현하고 있더라구요. 제가 정확히 보았나요?
유치진 | 잘 보셨습니다. 지주와 마름에 의해 행해지는 착취와 수모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나타냈고, 국서의 가난과 고통은 그런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인해 생긴 우리 민족의 빈궁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그러므로 말똥이의 행위, 즉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른 행위는 일제의 수탈정책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항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아무 | 저는 진주 출신의 소설가 엄흥섭에 대해 조사하고 개인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는데요, 1930년 발표한 단편소설 <흘러간 마을>의 후반부에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이 민요를 부르며 악덕 지주 최병식의 별장으로 몰려가 항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고서방이 최병식의 별장에 불을 지르는데요, 이때 민요가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마을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로 평단에서도 소설에서 민요를 이용한 것에 대해 신선하다며 굉장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구요, 그 작품으로 엄흥섭은 카프의 중앙집행위원에 보선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소>에서도 그런 민요성의 노래가 매우 잘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유치진 | 저도 공감합니다. <소>는 소를 중심으로 한 삼각구조와 반어적 구조 속에서 탄탄한 극적 갈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민요성 노래가 주는 리듬과 율동의 가락, 그리고 희극적 페이소스가 비극적 정황과 대조되어 관객과 호흡이 일치”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까지 받았지요.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였지요.

하아무 | <소> 때문에 일경에게 고초를 겪기도 하셨지요?
유치진 | 그랬습니다. 제가 1955년엔가, 현대문학 통권 5호 <극작가 수업 30년>이란 글에서도 밝혔듯이 “<토막>과 일련 상통되는 작품으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빈민가>, <소> 등으로써 압박받는 현실 속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생활상을 그렸지만 일경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류의 취제(取題)를 더 계속하게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주제가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상연이 금지되었고 나도 종로서에 붙들려 가게 되었지요. 아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입니다.

하아무 | <토막>과 <소>는 요즘도 간혹 후배 연극인들에 의해 상연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만, <소> 이후의 작품은 그렇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선생님이 앞서 말한 잡지 글에서도 밝히셨다시피, <소>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고 “그 사실이 나의 작가생활에 일시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셨거든요. 평자들은 그 사건 이후 “고발적 예봉이 꺾이고 전환의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유치진 | ……. (잠시 생각한다.) 하선생은 혹시 경찰 취조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이미 내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덤벼드는 일경의 취조를? 당연히 없겠지요.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실정이 우리의 현실생활에 대해서는 도저히 심각한 메스를 넣지 못하도록 탄압이 심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가로서 <마의태자>, <춘향전> 등 먼 시대의 것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의 유감이요, 굴욕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그러나 당시의 실정으로는 불가피한 사정이기도 했습니다.”

하아무 | 예, 그 때문에 1938년인가요, 임화는 동아일보에 쓴 <극작가 유치진론>에서 “유치진의 작품 세계가 리얼리즘 빈곤으로 독창성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구요, 김옥이는 “유치진은 그 시대가 강요하는 현실의 중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이 부족하였다”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유치진 |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1935년 조선일보에 쓴 <역사극과 풍속극>이란 글에서 내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왜 꼭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테마를 과거에서 구한다고 결코 현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란 언제든지 현재와 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말하는 것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요, 현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아무 | 하지만 유민영이 <저항과 순응의 궤적>에서 <마의태자>에 대해 지적한대로 “유치진이 내세운 의도, 즉 당시 현실을 비판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사랑 이야기화 해버렸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도 시대극복의 의지가 아니라 단순히 흘러간 시대의 망국의 한일 뿐”이지 않습니까.
유치진 |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일경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니까 그러네. 내가 1938년 매일신보에 <연극진흥책>이란 글에서 밝혔듯이 어느 정도 “리얼리즘을 토대로 하지만 결국 로맨티시즘”의 성격을 가지지 않으면 허용이 안 되었어요. 아까 하선생이 엄흥섭 씨 얘길 꺼냈었는데, 나도 그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흥섭 씨도 1935년엔가 조선중앙일보에 <리알과 로맨의 융합>이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회적 리아리슴 뿐만 아니라 ×××(혁명적) 로맨틔시슴도 리알(리얼리즘)과 어깨를 근래 조선의 문단에도 이 조류가 밀려들어왔다”고 말한 바 있어요. 그래서 내가 1937년 동아일보에 <낭만을 무시한 작품은 기름 없는 기계>란 글에서 “말초적인 리얼리즘에만 구속되지 말고 좀더 인간의 자유스러운 감정, 공상, 희망, 분노, 이데올로기 등을 태(胎)한 로맨틱한 수법이라야 일반 독자나 관중을 애필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겁니다.

하아무 | 예, 엄흥섭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자 로맨티시즘에 경도되었던 게 사실이고, 그 때문에 욕을 먹는 것도 사실입니다. 표현이 좀 거칠어졌습니다만, 엄흥섭도 1940년대 들어 통속소설을 다수 발표하면서 도피처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았지요. 선생님의 경우도 “신라 패망과 고려통일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실의 배후에 깔려있는 내면적 충돌이나 갈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지 못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선명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얘기도 듣게 된 것이지요.

둘째날 : 껄적지근
셋째날 : 데면데면
순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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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양하 하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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