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그녀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보고싶어 해서 나를 찾을 것이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 후에 혼란스러움이 많이 가신 채로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나는 졸업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취직을 하고, 여러 여자를 만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구러 대학에 들어가던 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때 그 평범한 일을 잊을 만한 새로운 추억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성실한 남편이었고 관대한 아빠였다. 물론 시나 소설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그 때문에 밤을 새지도 않았다. 보통의,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을 중심에 두고 휴가계획을 짜고, 종신보험과 교육보험 따위에 들어두었고, 자동차와 작은 집을 장만하였으며, 갈수록 커지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 입사동기들보다 조금 일찍 과장으로 진급도 하였다.
모든 것은 하나하나 싸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것들을 쟁취하였으므로 그런 대로 만족할 만한 나날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 외에는 돈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바로 오늘 아침 남들보다 조금 빨리 이른바, 명예로운 퇴직을 당하였다. 회사 로비에 걸려 있는 게시판 앞에 오종종 모여있던 직원들의 나를 보는 눈빛이 그 사실을 안타깝게 전해주었다.
“어떡해요, 과장니임.”
여직원의 목소리가 학교 앞에 내려준 딸아이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다른 직원의 목소리는 아내의 목소리와 겹쳐 들리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들은 게시판에 붙어 있을 ‘명예퇴직자 명단’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신들과 구분 짓는 것처럼 들려 당혹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나보다.
“그렇다고 그냥 나가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무슨 수든 써봐야죠.”
활달한 성격의 최대리가 손을 잡아끌었다.
“강과장님, 부장님께서 부르시는데요.”
신입사원이 부르는 소리 너머로 “이봐 강과자앙, 자초지종이나 들어봐얄 꺼 아니야.” 외치는 송부장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더 등을 떠미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어려운 국내외 경제니, 갈수록 힘겨워지는 기업경영 따위의 설명을 들어 무엇하겠는가.
회사에 들어서기 전과는 아침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햇살이며 공기, 자동차 소음까지도 낯설어 서먹하게 하였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발걸음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혼자 있기보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뒤늦게 나를 따라왔다.
출근시간이 지났음에도 승객은 많았다. 외근을 하는 직장인도 있었지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대학생들, 가벼운 등산복을 입은 노인네들, 문화센터나 계모임에 가는 듯한 주부들, 직업을 알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차림의 사람들이 비교적 여유롭게 신문을 보거나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현듯 양복과 넥타이가 거추장스러워졌다. 그래, 나도 저들처럼 자유롭고 여유로워진 거야. 그러자 거짓말처럼 억울하고 황당했던 기분이 훨씬 느긋해졌다.
더불어서 매우 익숙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그래, 느닷없이 찾아온 자유와 혼란스러움, 출감 후에 두부를 먹었어야 했는데. 제때 길찾기를 못한 자에게 찾아오는 허탈과 비애가 결국 동통을 불러오고 판단력의 마비까지도 야기할 수 있음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심야다방과 쌕쌕이, 문학동아리, 김진숙, 또 달맞이꽃과 담배, 치마바지, 가슴, 에스프레소.
휴대전화에서 투우사의 노래가 울렸다. 투우사는 소의 뿔에 받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을 아직 휴대전화는 몰랐다. 발신자는 송부장 책상에 놓인 회사 전화번호였다. 배터리를 뺐다. 그리고 아내가 골라준 넥타이도 풀어버렸다. 변두리를 헤매던 예전처럼 두 시간 가량을 무작정 걸었다.
문득 눈을 들었을 때 고속버스터미널이 거기에 있었다.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고 난 후에 ‘왜 탔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커피숍이 있는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아래에서 아내와 딸아이가 무슨 소린지 팔을 휘저으며 외쳐댔다. 그 팔을 잡으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칠판에다 붉은색 분필로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나는 풍선을 안고 있었으므로 죽지 않았다. 그 풍선에는 이상하게도 젖꼭지가 달려 있었고 주위는 온통 달맞이꽃 천지였다.
고향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강둑으로 갔다. 아래 강변은 제법 잔디를 깔아 체육공원으로 조성해 두었고, 강둑도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랬는지 달맞이꽃이 예전의 3분의 1도 안 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날 그 새벽처럼 답답증과 헛헛증이 동시에 찾아와 곧 터질 듯하였다. 나는 꽤 여러 시간 동안 그렇게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그 사이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켜졌다. 몇 가족이 산책을 하고, 젊은 풍물패가 한 시간쯤 신나게 연습을 하고, 많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혹은 한 몸인 듯 꼭 끌어안고 속삭이다 돌아갔다.
모두 가고 난 뒤에 비로소 나와 강물소리만 남게 되었다. 강 주변으로부터 물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코 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때, 멀리서 어떤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연한 눈빛과 꼿꼿한 자세, 그리고 눈 아래에는 색기. 그러더니 내 옆에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내가 담배를 내밀자 맛있게 피우더니 팔짱을 걸어왔다. 전보다 탄력을 잃기는 하였으나 그리 나무랄 정도는 아니었다. 불쑥 아랫도리가 부풀어오르는 걸 느끼며 참으로 오랜만에 발기한 데 놀랐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마음 속으로 이번에는 이름을 물어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며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눈썹을 바르르 떨면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달맞이꽃이 내 손에서 바르르 떨며 천천히 꽃잎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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