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시를 통해 본 시인의 삶>
(1) 시대 상황

대부분의 지역에서 1920, 30년대에 근대문학의 전통이 시작된 데 비해 거창은 다소 늦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내세울 만한 문학인의 층도 얇았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등장한 김상훈 시인은 그런 점들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2003년 엮은 《김상훈 시 전집》의 해설 <거창의 지역문학과 김상훈>에서 언급한 ‘시인 김상훈의 자리’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온천지구에 있는 김상훈 시비



“시인 김상훈은 거창 근대 지역문학 속에서 가장 앞머리에 놓이는 시인이다. 이 말은 단순히 작품 선후 관계에서 앞섰다는 뜻을 더 뛰어넘는 의의가 있다. 그것은 그의 시와 문학이 어쩌면 가장 ‘거창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렇다.”(《김상훈 시 전집》, 314페이지)

김상훈 시인에 대한 연구와 선양사업이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 활발하다가 그의 고향인 가조면 온천지구 내 시비공원에 시비가 세워진 것을 정점으로 이제는 다소 시들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시들해진 것은 얕고 좁은 현대인의 관심뿐, 그의 시는 비슷한 맥락의 시인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대문학의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소중하다.

집집마다 원망스런 하늘을 이고

김상훈은 1919년 7월 10일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662번지 가야산 밑에서 태어났다.

누구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식민지 지배 아래서 모든 민중들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 찢기고 해체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와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로 불리는 민족분열통치기로, 어쩌면 김상훈의 정신사가 분열적 양상을 띠는 것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집마다 원망스런 하늘을 이고
원수가 복받는 땅이 꺼지기를 기다리는데
누구를 위하여 복사꽃은 피는 것일까
바람에 날리는 고운 잎잎이
굶주린 어린 것을 달래지 못할 바에야
무덤같이 황막한 이 마을에
무엇 때문에 철철이 봄은 닥쳐오는 것일까
-시 <복사꽃 피는 마을> 중 일부

당시 조선의 하늘은 절망 그 자체였다. 모든 민중들은 “무덤같이 황막한 이 마을에”서 어쩌지 못해 “원망스런 하늘을 이고” 살면서도, “원수가 복받는 땅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고대했다.

“1905년 이후 보호국체제 5년간을 거친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의병세력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탄압을 했다. ……또한 조선을 일본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일본기관 및 개인의 조선에서의 토지 확보, 토지세수입 증가를 통한 식민지배 재원의 확보 등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사회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고 개항 이전인 조선 후기와 개항기를 통해 일부 성장하고 있던 농촌 중간계급을 전면적으로 몰락시켰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 농민은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어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소작농화, 소작농의 세궁민화, 세궁민의 유리민 및 걸인화로 이어졌다(《이용악・김상훈 시에 나타난 가족 모티프 비교 연구》, 박은미, 건국대 석사논문, 1995).

이에 대해 강만길은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절대적 빈곤에 빠진 농민은 결국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최악의 경우 걸인 또는 화전민이 되거나 혹은 일본, 만주, 시베리아의 노동자로 이주하게 되었다. 실제로 1925년의 경우 1년간 농촌을 떠난 인구는 약 15만 명이었으며, 이후 이농인구는 더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고 했다.

왜적이 알뜰히도 앗아간
헐벗은 산에 송피인들 있느냐

모두다 드러누웠다
집집마다 곡성도 기진해 간다

날마다 한 번씩은 목을 매고 싶은
손마디가 굵은 농부의 아내는
밤새워 낫을 갈아도
원수를 노리는 게 아니다
솔껍질을 벗기려 산으로 가지만
모리배만 복받는 남조선의 산이라
어느 골엔들 솔이나 섰겠느냐

-시 <송피> 중 일부

3・1운동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그런 시대적 배경 아래 태어난 김상훈은 시대적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란 시골 마을은 일제의 수탈정책을 최일선에서 수행하던 현장이어서 “쑥과 송피와 겨와 눈물과/이렇게만 먹고 사는 불행한 가족들”을 직접 보고 자라야 했다. 그리고 해마다 “비릿고개까지 몇 명이나 굶어죽을런지”(비릿고개는 보릿고개의 오기로 보인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특히 그가 태어난 해는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해였다. 거창에서도 그 해 고종 황제가 죽은 1월부터 여러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죽자 독살설이 파다하게 일면서 온 강토는 비통의 물결로 들끓었다. 이에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 출신의 이주환 의사는 1월 31일 절세시(絶世詩)를 남기고 자귀로 목을 쪼아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남하면 안흥 태생의 윤봉의 의사도 2월 7일 81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고종의 승하로 촉발된 3・1운동의 불길은 거창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가조면의 3・1운동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는데, 3월 20일에는 400∼500여 명의 군중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고, 이어 3월 22일 거창읍 장날을 기해 3,000여 명의 주민들이 벌인 만세시위는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한다. 그 후 4월 8일 위천 장날을 기해 다시 한 번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하지만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방법을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무단통치를 지양하고 유화통치를 표방하는 일과 민족분열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일이었으니, 우리 민족을 이간질해 교묘히 수탈체제를 확립해갔다.

얼음 밑에서도
물은 흘러가는 것이다

모두가 얼어붙어
재밤중같이 어두운 골 안에
돌부리와 싸우며
울음마저 다물어 삼키고
그래도 물은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두려운 총칼 앞에서도
견디지 못한 고문의 상 위에서도
동무들의 혈관에 피가 흐르듯이
-시 <물은 흘러가는 것이다> 중 일부

그런 저항 정신이 아직은 생겨나지 못하였겠지만, 김상훈이 태어남과 동시에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저항 정신을 일깨울 수 있을 만한 일이 예비되어 있었는데…….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한양하 하아무

트랙백 주소 :: http://haamoo.idomin.com/trackback/8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