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은 코뿔소 엉덩이에 핀 해바라기"
잘난척쟁이 살바도르 달리가 그리 밉지 않은 이유
《지식인은 돼지다, 고로 나는 최상의 돼지다》-알랭 보스케, 작가정신
나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런데 경남 남해에서 촬영됐던 드라마 <환상의 커플>이 방영될 때, 난 아주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았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의 중심에는 탤런트 한예슬이 연기한 조안나와 나상실이 있었다. 극중 장철수가 말한 바대로 ‘어이상실, 개념상실, 인격상실’의, 정말이지 밥맛 뚝뚝 떨어지게 하는 타입의 인물이다. 오만불손한데다가 도도하고 정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악녀다.
그런데 어찌된 게, 옆에 있으면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고 쥐어박고 싶은 성격의 그녀가 전혀 밉지 않다. 오히려 아무 기억은커녕 쥐뿔도 없지만 당당하기만 한 나상실이 사랑스럽기조차 하다.
책 이야기로 넘어와서, 희한하면서도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관련된 책이다. 프랑스 평론가 보스케가 달리와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 그래서 ‘달리에게 던지는 100가지 질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달리는 워낙 유명한 화가고, 그에 대한 책도 이미 많지만 이 책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달리를 예찬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 아니라, 달리의 입으로 직접 말한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담이 이루어진 것은 1960년대 중반. 193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간 달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시나 희곡을 쓰고, 기이한 퍼포먼스를 계획하고, 영화나 발레의 무대장치를 제작하고, 엉뚱하게 영생을 위한 과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화가로서의 달리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보스케는 “작품들을 핥던 시절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
그러나 달리는 그림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데 굳이 그림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투다. 그리고 시종일관 잘난 척을 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인은 돼지와 같은데 그 중에서도 자신은 최고의 돼지라는 둥, 자신의 그림 한 점이 피카소의 그림 모두를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는 둥, 자신이 ‘제국주의적’ 천재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둥, 자신이 미국에 사는 이유가 “수표 더미가 설사처럼” 자기에게 쏟아지기 때문이라는 둥,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는 둥, 정말 잘난 척의 끝이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따로 없다. 분야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나상실(조안나)와 막상막하다. 그런데 그의 답변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의 자화자찬이 솔직함과 버무려져 밉지 않게 다가온다. 나상실의 경우와 비슷하게 말이다. 당당함과 함께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독설과 조롱, 해학, 그리고 천재성에 은근히 동조하게 된다. 생각해보라. 만일 자신의 동상을 세워준다면, “거대한 코뿔소 모습에 엉덩이에는 해바라기를 조각해주길 원한다”니. 게다가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이 지상에서 제대로 맛볼 수 없었던 ‘음란’을 마음껏 탐닉해 보겠”단다.
그의 작품보다 그 자신이 더 작품 같았던 달리. 그의 개성 넘치는 답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환상의 커플>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또한 창의적이다. 잘난 척도 이 정도면 애교다. 잘난 척하지만 세상을 창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재미있지 않은가.
* PS-<환상의 커플>이 방영될 무렵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