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은 현장-지리산
지리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지금도 흐를 붉은 피 ; 철쭉꽃
문순태의 소설 <철쭉제>에 “철쭉꽃 색깔이 표가 나게 시뻘겋게 붉은 곳”에 묻힌 주인공의 아버지를 품고 있었던 바로 그 철쭉이다.
내가 품고 있었던 것은 그저 한 사람의 유골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모든 역사를 낱낱이 보아왔고, 밤마다 그 꿈을 꾸면서 꽃을 피워왔다.
그 꿈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 꽃잎은 더더욱 붉은 색조를 띠어갔다.
피보다 끈끈한 붉은 꽃들이 들불처럼...
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정인이 소설 <철쭉제>에서 “핏빛처럼 진한 빨강과 물빛보다 더 푸른 파랑이 풀들의 푸른빛 위에서 아침의 첫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풀들 속에는 흘린 피보다 끈끈한 붉은 꽃들이 들불처럼 번져 있었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파랑과 빨강의 대비가 뚜렷한 철쭉이 바로 나다.
김지하 선생의 회고록-흰 그늘의 길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김지하, <지리산> 부분
송수권 시인은 말했다.
“지리산은 민중의 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산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산, 근대사의 피로 얼룩진 산이다. 봄눈 녹으면 어린 곰취싹을 캐어 죽을 쒀먹고 파르티잔은 그 죽그릇(반합)을 두들기며 이런 노래 불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민중적 언어의 가락과 탁월한 정치의식이 결합된 김지하의 시 면모가 잘 드러난 시다.
지리산에 올라 피가 끓었던 이가 어디 김지하 뿐이었으랴.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 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을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이현상, 제목 없는 시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시다.
언제나 가슴에 ‘조국’이 있었지만 그 조국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여져 왔고, 아직도 이념의 칼날은 무섭기만 하다.
조국의 이름으로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죽은 후에 다시 죽는 무참하고 치욕스런 일도 수없이 일어났다.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문순태의 소설 <피아골>의 주인공 배달수가 자신의 가계를 통해 ‘정유재란-동학혁명-의병전쟁-3.1운동-여순사건-한국전쟁’을 경험하는 것은 온전히 지리산의 역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을 100번도 넘게 올랐던 이성부 시인은 작은 동물이나 식물의 미세한 떨림이나 냄새에서도 그 모든 사연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지지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이성부, <벽소령 내음> 부분
이처럼 수많은 시인들이 지리산을 역사의 공간으로 인식해왔다.
우리 문학사의 거미줄에 걸린 시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
솟아 올라라. 천왕봉.
뿌리째 한꺼번에 솟아 올라라.
무너지며 부서지며 곤두박질치며
죽은 자의 이름까지 부르짖으며
네가 가진 칼과 칼을 번뜩여 다오.
-양성우, <겨울공화국> 부분
수많은 아기 시인들을 길러내고
싸움꾼들을 길러
그들과 함께 벼랑에 서서
온몸을 불태운 산
-이시영, <산> 부분
지리산 등성이 여기저기 누운
산사람 혹은 국방군
그들이 뒤엉켜 함께 피우는
찔레꽃
지리산 찔레꽃.
-최두석, <지리산 찔레꽃> 부분
늙은 애비 헛간에서 죽었더란다
두 섬 쌀마지기 숨겼다고 쪽발이놈이 죽였더란다
고운 아내 골방에서 죽었더란다
벌건 대낮에 강간하고 양키놈이 죽였더란다
어이어이 못 산 애비 떠메고 들어갔나
어이어이 못 산 아내 묻으러 들어갔나
꽃아 지리산꽃아
-오봉옥, <지리산 갈대꽃-아버지 10> 부분
시인들이 그런 역사적 인식을 편편이 부분적으로 드러냈다면,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박경리의 <토지>는 좀더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동학혁명으로부터 일제식민지, 3.1운동, 대동아전쟁, 해방, 한국전쟁과 휴전협정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옹이를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있는 지리산
누구는 용서를 이야기 하고 또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성급하고, 아직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비극 혹은, 비극적 인식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 자체가 무색해지고 만다.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넘치듯이
그렇게 그렇게 나의 모오든 말을
세상 곳곳에 뿌려주어야 한다
사실은 그들의 말인 나의 말을
사실은 그들의 노래인 나의 노래를.
-김준태, <지리산을 넘으며> 부분
아직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에는 이르다.
아직도 끓어 넘치는 말은 너무나 많고 뿌려주어야 할 곳도 많다.
아직도 하기 두려운 말과 사연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풀리지 않은 매듭을 안고 그대로 지리산 고사목처럼 말라죽어버린 사람도 많다.
말하지 못해 한이 되어버린 옹이를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있는 지리산.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짜증스럽게 “이미 지나간 일, 이제 와서 도대체 뭘 어쩌라고?” 푸념하는 사람들에게 현재로서의 역사를 거듭거듭 일깨우려 노력한다.
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한반도 근대사 속을
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감꽃폭풍.
-허수경, <지리산 감나무> 부분
그러면서 하나둘씩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는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근현대사를 배우고 걸어가면서 자신이 선 자리를 확인하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밝음 나누어 받고
우리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걷어내고 걷어내도 자꾸 몰려드는
세상의 저 먹구름 걷는 일에 이 목숨 바치리라
-이동순, <새벽 지리산> 부분
해마다 지리산에 올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혹은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들, 나를 꺾거나 짓밟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을 읽는다.
옛날보다는 역사를 생각하고 혁명적 각오를 다지며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를 비장하게 부르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지금도 흐르는 붉은 피...
수가 많이 줄기는 했으나 전혀 없지도 않다.
가만히 “눈 쌓인 산을 보면/피가 끓는다/푸른 저 대샆을 보면/노여움이 불붙는다./저 대 밑에/저 산 밑에/지금도 흐를 붉은 피”를 가만가만히 읊조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직으로 쫓겨나거나 그럴 위기에 처한 사람들, 한미 FTA 여파를 우려하며 “악과 깡으로 싸워나가겠다”고 다짐하는 농사꾼, 노동상담소 사람들을 따라 산에 오른 외국인 이주노동자, 지하철 역에서 노숙하다 몇 년만에 산에 오른 노숙자, 그리고 서로 잡아주고 끌어주며 천신만고 끝에 산에 오른 장애우들도 있다.
이들은 단순히 예전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추억에 잠긴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지금도 ‘붉은 피’를 흘리고 있으므로 지리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고, 혁명을 꿈꾸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꿈이다.
그들이 피를 흘릴수록, 혹은 혁명의 꿈을 꿀수록 내 꽃잎은 더욱 붉어지고 꽃잎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밝은 시인이라면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