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무

효율적 독서-빨리, 많이 읽기보다 탐독하라!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8. 23:32

영어만 가르친다고 세계인 되는 게 아니다
《탐독》-이정우, 아고라

하아무(소설가)

아버지는 내가 책 읽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 교과서와 학과 공부에 필요한 책을 제외한 ‘쓸모없는 책(!)’ 말이다. 하지만 빗자루 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엉덩이를 얻어맞고 성적이 치솟았다가 곤두박질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책 읽는 ‘몹쓸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죄와 벌>, <적과 흑>, <부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목로주점> 등. 아버지의 지원을 받지 못해 간간이 ‘삥땅’ 쳐서 산 책이 주로 삼중당 문고판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에 세로쓰기였던. 그걸 읽으려고 조도 낮은 불빛 아래서 밤새 눈에 불을 켰던 기억. 그러다 아버지께 들키면 또 엉덩이에 불이 났고.

라스꼴리니꼬프의 도끼질에 치를 떨었고, 줄리앙 소렐의 야망과 사랑에 설레었고, 카추샤의 고난에 가슴 아파했던 순간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으면 또다른 의미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곤 했던 기억들. 아마 책 읽느라 날밤을 새워본 사람이라면 그런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에게 그런 일이 드물다. 그들은 외친다.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시간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급하고 바쁘다. 밥도 패스트푸드로 빨리 먹고,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빨리 이동하며, 사람도 빨리 만나고 헤어진다. 책도 그렇다. 빨리 많이 읽는다. 독서퀴즈도 하고, 수행평가도 봐야 하며, 독후감 대회도 나가야 하고 논술도 대비해야 한다.

많이 읽기는 하는데 그리 감명 깊게 본 건 없다. 심지어 분명히 읽었는데 지은이도 주인공도 사건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독후감 대회 심사를 보면, 대강 한 번 읽고 첫 느낌을 쓴 글 뿐이다. 두 번, 세 번 탐독하고 깊게 느끼고 생각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겉만 핥고 깊은 맛이 없다. 필자가 1년에 대여섯 번 이상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이나 청소년 문학상 등에서 심사를 보았는데, 그때마다 수백 명의 중․고․대학생들이 제출한 글들이 다 비슷비슷해 씁쓸했다.

오래 전부터 책을 빨리 읽도록 가르치는 학원이 성업 중이란다. 들어보니 눈을 상하좌우로 굴리는 연습을 해서(컨닝을 할 때 필요한 운동이 아니던가!) 힘들지 않게 단시간에 책을 읽게 한단다. 이렇게 읽으면서 과연 ‘치를 떨고, 사랑에 설레며, 고통에 함께 가슴 아파할’ 수 있을까? 주마간산(走馬看山), 본래 달리는 말 위에서는 세세히 다 볼 수 없는 법. 이즈음의 독서교육이 걱정스럽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나 역시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이 더 많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책이 주려는 미세한 떨림과 울림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실제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대부분 점수(독서퀴즈, 독후감 따위)도 낮게 나온다는 사실. 대입 논술에서도 창의성의 배점이 가장 높지 않던가.

단 한 권을 읽어도 탐독을 하게 하자. 철학자 이정우 씨는 이 책에서 탐독이 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유목적 사유’, 쉽게 말해 세계인으로서의 품성을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영어만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세계인으로서의 품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미국의 뒷골목 어딜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백악관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거, 아시는가? 부시를 ‘책 안 읽는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탐독(유목적 사유의 탄생) 상세보기
이정우 지음 | 아고라 펴냄
이정우의 독서 인생과 지적 순례기를 담은 <탐독>.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삼국지를 보며 울고 웃던 소년이 철학자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생각을 키워준 다양한 책들과 지적 성장의 기록을 전해주며,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학문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해온 철학자의 모습을 담은 에세이이자, 결코 가볍지 않은 지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