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찾아서(6)점점 투명하게 변해가는 육체가...
5.
나는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며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고도는 내 포도와 함께 마지막 남은 영혼을 가져갔다. 그래서 난 그날 이후 영혼 없는 잠을 자고, 영혼 없는 꿈을 꾸며, 영혼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기다리고 있다. 이유나 목적 같은 건 없다. 영혼이 없으므로.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이제 그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전정가위를 사와 가지치기도 하고 거름도 낸다.
요즘에는 내 육체가 그의 가시에 꿰어 있는 꿈을 자주 꾼다. 내 육체가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고도가 돌아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왜 그걸 바라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계속 그래왔기 때문인 것 같지만 정확한 건 아니다. 그렇다, 모두 정확하지 않다. 꿈속을 사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 속의 삶 같기도 하다. 내가 사람 같기도 하고 고슴도치인 것 같기도 하다. 점점 내 몸이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다. 내가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아아, 그러려면 빨리 고도가 와야 할 텐데…….
*
여기가 끝인가? 무슨 소설이 이렇담. 찜찜해. 예전의 수정이 글은 깔끔하고 담백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했고. 그런데 이건 전혀 수정이 글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고슴도치가 영혼을 빼앗아 간다고? 그래,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 고슴도치가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훔치는 건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훔치는 것과 같다는 얘기. 그렇다면 수정이가 말하는 고도는……?
아, 간식 다 먹었어? 그럼 과외 갈 준비 해야지? 태워다 줄게. 자, 엄마 차에 타.
(……)참, 너 과외선생님이 내주신 숙제 다 했니? 영어 단어 외우는 거랑 영어 일기 쓰는 거 말야. 시골서 학교 다닌다고 여기 애들처럼 하면 놀기만 하면 안 돼, 알았니? 너 아토피 확실히 나았다 싶으면 금방 서울 갈 거야. 그러니까 서울 애들한테 뒤지지 않게 열심히 해야 돼.
(……)자, 다 왔다. 그래, 열심히 해. 엄마 뽀뽀. 나중에 마칠 때쯤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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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나야. 뭐? 아니, 당신 바쁜 시간인 줄 아는데……, 그래도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 주면 어디 덧나? 아니, 안다니까. 당신 간이고 쓸개고 빼놓고 돈 버느라 힘든 줄 아는데, 나도 당신만큼 힘들단 말이야. 내가 여기서 꽃놀이하고 노는 줄 알아? 나도 여기 유배 온 기분이란 말이야. 여긴 감옥이야, 감옥. 창살 없는 감옥. 가뜩이나 대학 동기라는 애 때문에 기분 꿀꿀해 죽겠구만. 알았어, 알았다구. 끊을게. 그나저나 바쁘니 어쩌니, 접대 핑계 대고 지난번처럼 외박하고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못 참아. 한 번 더 그러면 정말 우린 끝이야, 알았어?
돈 버는 게 무슨 큰 유세라고……, 나쁜 새끼.
*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어휴, 웬 풀이 이리 무성하담. 얘는 마당에 풀도 안 뽑고 청소도 안 하나? 꼭 폐가 같은 분위기잖아. 온통 거미줄투성이고, 먼지 쌓인 것 좀 봐. 대낮인데도 귀신이나 도깨비 하나쯤 나올 분위기네.
계세요? 수정아, 최수정! 어딨니?
아무도 안 사나? 분명 푯말에 ‘고도포도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아까 전정가위 사다가 당장 가지치기해야 한다고 서두르더니, 이것 봐, 가지치기는커녕 손도 안 댔네. 어머, 저게 뭐야. 두꺼빈가? 어휴, 왜 저리 커? 황소개구리만 하겠네. 끔찍해. 그나저나 얜 도대체 어찌 된 거야?
얘, 수정아! 소설가 최수정 씨, 어디어디 숨었니? 머리카락이라도 보여라! 어, 현관문도 부서져 있고, 사람이 안 사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엇, 저건…… 전정가위네. 포장도 안 뜯었잖아. 수정이네 포도원이 맞는 것 같은데, 사람이 살거나 드나든 것 같은 흔적은 없고, 이것 참. 여기 사는 거야, 안 사는 거야. 귀신이라도 있으면 붙잡아 물어보고 싶네. 참, 아까 아줌마 말로는 못 본지 대여섯 달 됐다고 했지. 그럼 어디 딴 데로 이사 간 건가? 하지만 아까 분명히 제 입으로 여기 산다고 했는데, 그리고 전정가위가 여기 있고. 아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네. 고도의 가시에 자신의 육체까지 꿰었다고 했고, 점점 투명하게 변해간다고 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를 기다리고, 그 덫에 걸려 중독된 나머지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훔쳐간 고도를 기다린다? 아님, 기다리다 못해 고도를 찾아 나서기라도 한 걸까?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애들 데리러 가야 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전화번호라도 물어보는 건데, 할 수 없지 뭐. 아무튼 참, 희한한 애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