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그림, 큰 감동, 우리 시대 만화의 걸작
<부자의 그림일기>-오세영, 글논그림밭
하아무(소설가)
사천 사는 박구경 시인의 시집에 실린 <은미야>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 흉내를 내다가/쇠여물 썰던 작두에 한쪽 팔을 잃었지만/(중략)/엄마가 눈물 앞세워 만든 체크무늬 토시로 감추고/철없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노루밭길을/팔랑팔랑 다니던 꼬마 가시내”
이 책 <부자의 그림일기>에 나오는 부자도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애다. 농약 치다가 아빠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는 공사판과 파출부 일을 하는, 이름만 부자인 아이, 나부자. 다른 엄마들은 화장도 하고 옷도 예쁘게 입고 학교에 와 선생님한테 하얀 봉투를 내놓는데, 부자의 엄마는 봉투는커녕 공사장에서 일하던 대로 ‘몸빼’에 ‘쓰리빠’를 신고 와 부자를 창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거창의 한 초등학교 여자애가 손수 뜬 목도리를 1년 동안 고생한 담임선생님한테 선물했다가 당한 어이없는 일도 떠오른다. 선생님이 선물 받은 목도리를 같은 반 반장에게 줘버렸다던….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작은 손을 놀렸을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한데, 교사는 왜 그랬을까? 아하,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그랬지. 알레르기라…, 그 참, 듣고도 잘 이해가 안 되네.
만화가 오세영의 단편 13편을 모아 엮은 만화책이다. 치고 박고 실없이 웃기며 아이들 말초신경만 자극해대는 만화책이 아니니, 부모들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다. ‘고향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선으로 우리만의 것을 제대로 그려내는 예술만화 작가’로 유명한 분이니까. ‘따뜻하고 군내나는 인간주의’가 주는 감동이 만만치 않다.
특히 표제작 <부자의 그림일기>가 주는 객관적 관점의 감동은 우리 만화계의 큰 성과다. 아이의 눈높이로 쓰인 그림일기, 대사가 생략되고 절제된 구성, 그러면서도 상황을 쉽게 이해하고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형식실험, 주관적 견해를 최대한 배제하고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점 등은 깊은 작가정신을 엿보게 해준다.
다른 엄마들과 부자 엄마의 대비, 아버지의 주검을 실은 상여를 보는 부자의 눈, 철거반원에게 포장마차를 빼앗긴 엄마의 표정, 추석날 밥과 냉수만 올려진 차례상, 운동회 연습 때 재잘거리는 아이들 틈에서 혼자 무용복을 입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그 중에 단연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운동회 날, 무용복이 없어 혼자 구석에 있는 부자를 발견한 엄마, 한 손에 빵과 우유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부자의 손을 꽉 잡은 엄마, 언제나처럼 엄마가 또 우시겠구나 하는 부자의 생각과 달리 엄마의 표정은 점점 무섭게 변한다. 그리고 부자의 손을 잡아끌고 무용을 하고 있는 아이들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간다. 그리고 소리친다. “2학년 10반 어디요, 우리 애도 2학년 10반이란 말이요.” 더 이상 울지 않는 울보 엄마,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부릅뜬 표정, 주먹을 꽉 그러쥐고 운동장을 향하는 모습은 내내 잊히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이제 더 이상 작가가 이런 작품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점. 역량의 고갈이 아니라 시장의 현실 때문이란다. 대중만화에 잡지나 출판사가 치우쳐 있다 보니 발표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안타까운 일이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