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그들이 희망이다
불행한 청소년들의 혼란스러운 정체성
<무서운 아이들>-쟝 꼭또, 청림출판
하아무(소설가)
쟝 꼭또는 게이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에게는 평생 애인이 둘 있었는데, 첫 번째 애인이 천재작가 레이몽 라디게였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을 때였는데, 라디게는 열여섯이었다. 두 사람의 열렬한 사랑과 폭음, 무절제한 생활은 유명하다.
헌데, 라디게가 장티푸스로 스무살에 요절을 해버린다. 충격에 휩싸인 쟝 꼭또는 심한 자기 학대와 아편에 빠져버렸고 급기야 요양원에 실려가고 만다.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쓴 소설이 <무서운 아이들>이다. 불어 그대로 ‘앙팡 테리블(Les Enfants terribles)’로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제는 관용어가 되어버린 말이다.
허약하고 게을러터진 사내아이, 악만 써대는 여자아이,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 고마움을 고맙게 알지 못하는 무관심, 잡동사니를 보물로 여기는 취미, 빨래집게로 코를 집고 자는 아이, 말끝마다 ‘괜찮다’고 하는 아이 등등.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혼란스런 정체성과 그런 아이들의 심리와 욕망이 세밀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누군가 “가장 비참한 현실만이 가장 극적으로 현실을 벗어나 가장 화려하게 현실을 재구성하게 한다”고 했던가(송기원의 소설 <여자에 관한 명상>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재구성하기에는 현실의 비참함이 너무 크고 깊다. 악마성으로 반짝이는 아이들의 거친 말과 행동, 냉혹함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읽어갈수록 ‘재구성’에의 희망을 지워간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급기야 뽈과 엘리자베뜨는 죽고 만다.
오누이는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서로 욕하고 헐뜯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애증의 관계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장면을 보는 건 왠지 불편하다. 엘리자베뜨가 독약을 마신 뽈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마치 애인이 상대방의 쾌락을 기다리느라고 자기의 쾌락을 늦추고 있는 것처럼 방아쇠에 손가락을 갖다댄 채 동생의 죽음의 경련을 기다렸다.’ 쟝 꼭또가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진실미가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죽어서 간 곳이 관습이나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구원의 세계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당시, 수많은 청소년들이 주인공과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이 다른 한편으로 놀랍다. 이 때문에 그의 기교 뒤에 진실한 표정이 숨어 있다는 평가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 아래 있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무서운 아이들’이란 관용어가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희망사항’일까. 요즘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다.
PS.
2006년 쯤에 쓴 글이다. 이 글에서처럼, 한때 요즘 아이들이 무서웠더랬다....근데 2008년 5월 현재 아이들이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무서운 아이들' 때문에 광우병 의심소도, 어처구니 없는 대운하 계획도, 그밖에 어처구니 없는 많은 정책들도 물건너 갈 거라고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