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무

“난 열두 명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27. 03:15

《여우가 늑대를 만났을 때》-앙헬레스 마스뜨레따 , 자작나무

하아무(소설가)

그렇다. 이 책은 멕시

코 여류작가의 페미니즘 소설집이다. 표지에 ‘멕시코 최고 권위의 마싸뜰란상 수상 작가’라고 적시해 두었다. 늑대가 여우를 만난 게 아니라 여우가 늑대를 만난 것이다. 여우가 주체란 말이다.

첫 번째 작품, <결혼하지 않는 여자>. 결혼하지 않고 열두 명의 남자를 열렬히 사랑한 여자 클레멘시아의 이야기다. 여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무시하고 뭇 남성과 거리낌없이 사랑을 나눈다.(내가 아는 여자들 가운데에도 있다.)

두 번째 작품, <지적인 여자>는 너무나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에게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야기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녀가 서로 끌린다는 속설.(내 주변엔 이런 여자도 있다.)

세 번째는 <남녀 사이의 우정>. 비밀을 간직한 여자 크리스티나와 그 비밀을 나누며 평생 친구로 지낸 수아레스의 이야기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있을 수 있냐고? 당연히 있다.(그리고 당연히 내 주위엔 이런 사람들도 있다.)

네 번째 작품 <한 남자 시체 앞의 두 여자>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와 산부인과 여의사가 나온다. 재미있는 건 아내가 남편과 여의사의 감정을 알고, 나중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여의사를 감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 친자매처럼 지낸다는 것. 도대체 이런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내 주위엔 이런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죽을 사(四)는 불길하다. 그러니 다섯 번째까지만 보자.) 다음은 <치즈를 사는 여자>. 능력 있고 잘 생긴데다가 성실한 남편을 둔 마리아나가 평범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한동안 외도를 즐기던 그녀는 남편에게 죄책감을 가지지만 이내 그 죄책감을 지워버린다. 남편도 외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런 예는 너무나 많다. 거의 매일 등장하는 드라마 주제이고, 그걸 온 가족이 보지 않는가.)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을 전후로 해서 살았던 여자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설이다. 기존의 철저히 억압되어온 여성의 욕망과 감정 대신,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그들의 노력과 갈등이 엿보인다. 이는 괄호 속에서 밝혔듯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유사성에 먼 나라의 이색적인 작품이지만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진다.

반면 형식적인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 2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모두 18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 1편이 보통 단편소설보다 훨씬 짧은데도, 주인공들의 전생애를 다루고 있어 흡사 장편소설을 요약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있잖아, 우리 옆집에 사는 그 여자 말이야. 글쎄, 그 여자가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여자들의 수다를 엿듣는 느낌이랄까. 쉽고 재미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식으로 소설을 썼다면, 모르긴 해도 평론가들의 십자포화를 맞았을 것이다. 극적 긴장이나 기복 없이 단순한 구성에다 대중적인 내용 때문이다. 비록 함축적 의미나 아이러니를 동반한 암시적 언어가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지만, 아마도 콩트와도 같은 가벼움을 그들은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니 뭐니 해서 예술적 취향이 다소 변했다고 해도 ‘무언가 있는 체하는 그들의 습관’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우가 아닌 늑대로서 한마디. 요즘 여우는 보통 여우가 아니라 모두 구미호인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여우와 늑대가 만나 같이 사는데 토끼가 태어날 수 있는 걸까?


여우가 늑대를 만났을때 상세보기
앙헬레스 마스뜨레따 지음 | 자작나무 펴냄
여자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사랑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다양한 인생을 통해 보여주는 은밀하고 유쾌한 사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