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하

가족,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6. 6. 02:13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J.W. 피터슨 지음ㅣ히말리야
 
 
황사와 봄비가 번갈아 오더니 꽃잎이 졌다. 화사한 꽃망울에 눈이 호사를 누렸다. 이제 파란 잎들이 꽃만큼이나 싱싱하게 몸을 흔들고 있다.

나무가 좋은 것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늘 마음을 두고 눈여겨보지 않았어도 그 자리에 있어서 변화를 알 수 있다. 어여뻐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보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도 않는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는 한 그루 나무 같은 책이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자기 동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보아달라고 기교도 부리지 않았으며 특별하게 시선을 끄는 곳도 없다.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도 수수하다.

그런데 자꾸 이 책이 말을 걸어온다. 청각 장애를 가진 동생, 그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동생에게 말을 가르치는 엄마, 한 가족의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와 ‘가족’과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동생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피아노도 치고, 놀이터에서는 사다리 타고 올라가기 선수다. 동생은 풀잎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고 라디오가 켜졌는지도 알 수 있다. 손으로 만져서 알거나 몸으로 느껴서 알 수 있다. 동생은 피아노를 치지만 피아노 건반에 맞춰 노래를 부르지는 못한다. 뒤에서 불러도 모른다. 자기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말하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일일 뿐이다. 그래서 불편함이 있다면 불편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천둥번개가 치는 날 무서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동생은 새근새근 잘도 잔다.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소리에 갇혀 사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하룻밤 사이 아홉 번 강을 건넜다는 데서 보면 눈과 귀로 인해 외물에 갇히면 사물의 진정한 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지원은 실학자로 학문을 삶에 적용하는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꿰뚫어보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동생을 사랑하기에 듣지 못하는 동생의 이면을 찾아낸다.

동생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다. ‘엄마는 너를 더 사랑한단다’라고 눈으로, 미소로 말하고 있다. 수십 번을 가르쳐도 공을 ‘겅’으로 소리내지만, 또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 줄 모르기에 이웃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지만, ‘너는 엄마가 사랑하는 딸이란다’하며 타이르고 가르친다. 조금 부족해

도, 남 눈에 띄게 잘난 점이 없어도, 아니 특별한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가족과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이 책에서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따뜻한 눈을 기억하자. 동생 친구들은 “귀가 안 들리면 아프지 않아?”하고 묻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귀가 아픈 건 아니야.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마음이 아주 아플 거야.”

/한양하/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벨이마주 60) 상세보기
J.W. 피터슨 지음 | 중앙출판사 펴냄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을 둔 언니가 동생과 함께 놀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니는 자신의 동생이 특별하다고 말합니다.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가지 볼 수 있고, 라디오를 손으로 만져 보고는 켜져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으니까요. 가끔 우리는 '장애'라는 단어를 부족함이나 슬픔 같은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보통 사람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