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맙습니다. 읽고 곧 돌려드릴게요. 볼 사람도 없고 찾지도 않는다고요? 정말 제가 가져도 될까요? 고마워요. 예? 아, 그 세안비누 말이에요? 써보시니까 괜찮지요? 아유, 뭘요. 그리고 차 마시러도 자주 오세요. 올해 첫물 녹차 나온 거 있거든요. 지금 맛보시러 오세요. 그러세요, 그럼. 내일 시간 나시면 오세요.
참, 그리고 아저씨가 면사무소 계시니까 수정이가 혼자 사는지 아닌지 알아보실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뇨, 일부러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고, 제가 나중에 수정일 만나서 실수하지 않으려고요. 예, 어쨌든 책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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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나온 책이네. 3호면 모임이 생긴 지 얼마 안 됐거나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얘기네. 표지에 철쭉 사진하며, 뒷면에 단위농협 광고까지, 이렇게 촌티를 꼭 내야 했을까? 하기야 나보다, 우리나라 굴지의 K그룹 홍보실에서 사보를 만들었던 수정이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한심했을까. 목차를 볼까, 소설을 실었다고 하니까 뒤에 있겠네. 여기 있다……, 최수정, 응? 「고슴도치」? 자기 이야기를 쓴 건가? 188페이지라……, 읽어볼까? 아니, 잠깐.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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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최수정
1.
꿈속에서 꿈을 꾸었다.
인터넷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콘을 맞추어 마우스를 한 번 ‘딸깍’하자 큰 사진이 나타났다. “나야, 고슴도치!”라 말하고 정지화면에 걸린 듯한 표정의 작은 동물이었다. 한 번도 고슴도치를 본 적은 없지만 고슴도치라고 인정하기 사뭇 어려운 모습이었다. 내 머리 속에 저장된 고슴도치에 관한 정보는 어둡고, 더럽고, 거친 가시로 상대를 위협한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전체적으로 하얗고 작아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까만 눈 위로 난 흰 털이 눈가를 뒤덮어 순한 아이 같다고나 할까. 귀도 코도 발도 너무 깨끗하고 작아 마치 선물가게에 놓인 캐릭터 인형 같았다.
‘생각보다 귀엽네.’
스노우샴페인 고슴도치, 28만 원. 어떤 애완동물 가게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였다. 온몸이 하얀색인 그 녀석 외에 플라티나 고슴도치, 시나몬 고슴도치, 핀토 고슴도치 등 종류도 많다. 오른쪽에 있는 동영상을 클릭했다. 달린 제목이 「사랑에 빠진 고슴이」다. 사육통에 홀로 있는 고슴도치 한 마리가 안절부절 못하며 뭔가 소리를 내고 있다. 삐삐-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잭잭-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발정난 기색이 역력하다.
“불쌍한 녀석, 상대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해결해.”
하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자위를 하더라도 인간과는 다른 방법을 쓰지 않을까. 인간과 같은 방법을 쓴다 해도 손-아니, 발이라고 해야 하나?-이 제 성기에 닿을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의 성기는커녕 발등조차 내려다볼 수 없는 비만인처럼. 언젠가 미국의 사진가 찰스 게이트우드가 찍은 사진 속 초비만형의 여자를 보았을 때의 애처로움이 되살아났다. 늘어진 배와 엄청난 살들 때문에 그 여자는 나체였지만 음부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 부위는커녕 음모 한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보면 볼수록 크게 부각되어 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전시회의 주제는 ‘육체의 영광과 비참’이었던 것 같다. 어울리는군, 가시로 뒤덮인 작은 육체의 영광과 비참이라. 불쌍한 녀석.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을 잡았다. 등에 삐죽삐죽 솟은 가시가 억세고 자꾸 손바닥을 찌른다. 손을 배 쪽으로 가져가 대자 녀석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미세한 떨림, 그 작은 육체가 떨고 있다. 나는 녀석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애완동물을 파는 홈페이지의 판매전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느낌은 점점 강렬해진다. 모성본능이라는 것이겠지, 내게도 그런 본능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칼 융은 ‘그레이트 마더’라고 했다던가. 절대적인 다정함과 안정감, 그것을 바탕으로 보살피고 키워주는 위대한 어머니의 그것.
나는 ‘바로 구매’ 단추를 두 번 클릭했다. 그리고 스노우샴페인 고슴도치 수컷을 주문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기입해 나갔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우편번호와 주소, 전화번호와 카드번호 따위를 빠짐없이 적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특기사항에 직장에 출근해야 하니 회사로 보내줄 것, 아직 신입이니 되도록 상사들 눈치 보지 않도록 점심시간에 보내달라고 했다.
“최수정 씨, 주문하신 고슴도치가 도착했습니다! 싸인해 주세요!”
하지만 택배회사 직원이 내 이름을 크게 외친 건 부장님이 하반기 홍보전략에 대한 설명을 한창 하고 있던 중이었다. 부장은 화가 나 담배를 피워물었고,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 수령증에 싸인을 했다. 온 직원들의 눈길을 받으며 포장을 뜯자, 인터넷에서 보았던 바로 그 조그만 가시투성이 동물이 나왔다. “와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고슴도치는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섰는데, 아주 잘 생기고 키가 큰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물론 좀 비싸기는 했지만 고슴도치 주문하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고슴도치도 화답하듯, “수정이, 당신은 내 여자야.”라고 말했다. 깊고 깊은 입맞춤과 함께. 거 왜 있지 않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포스터에 나오는 그 자세의.
그래서 하루 걸러 연재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내일 5월 6일 (3)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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