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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설

고도를 찾아서(3)밤이 되면 완전 딴판으로 변해

2.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다.

그의 이름은 고도다. 동영상에 나왔던 ‘고슴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도치’라고 하기엔 더 이상했다. 그래서 고슴이와 도치 각각의 첫 글자를 따 ‘고도’로 정한 것이다.

“난 고슴이가 더 익숙하고 편한데…….”

그건 당연했다. 애완동물 가게에서 줄곧 그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주장했다. 어디 외식을 하러 나가거나 영화를 보더라도 사람들 많은 장소에서 “고슴 씨”라거나 “도치 씨”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그는 내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줄 만큼의 이해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조금 장난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당신 성은 고씨예요. 이름은 도, 한자로 길 도(道) 자를 써서 당신 자신의 길, 당신만의 인생을 뜻하는 이름이 되는 거죠. 괜찮지요? 그리고 그건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에 나오는 고도가 되기도 해요. 그 희곡에서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지만, 이렇게 당신처럼 짠 하고 나타나주면 좋겠다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을 담은 이름이에요.”

그는 자신만의 길이나 인생보다는 희곡 속 고도를 더 마음에 들어했다. 사람들이 날마다 기다리면서도 실제로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동시에 기다리는 것이 정말 올 것인가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확신도 주지 않는 존재로서의 고도. 아마도 그 신비스러움이 좋았던 것 같았다.

고도는 해가 뜨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해가 지면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 야행성이기 때문인 듯했다. 내가 출근한 뒤에 그가 무얼 하는지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대부분 내 오피스텔 침대에서 잔다고 했다. 하기야 지금껏 고슴도치로 살아온 그가 잠을 자거나 기껏 텔레비전을 보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완전 딴판으로 변했다. 욕구가 강한 정도를 넘어 섹스머신에 가까웠다. 그것이 마치 삶의 궁극적 목적인 양 줄기차게 해댔다. 대학 1학년 때 문학동아리 선배와의 첫 경험 이후 몇 명의 남자를 만나봤지만 고도만큼 계속 요구한 사내는 없었다. 격렬한 섹스 후 잠시 수그러든 링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대개 짧아도 10, 20분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했지만 고도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링가만은 뻣뻣한 가시처럼 내내 곤두서 작아지거나 수그러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엄청난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침 햇살뿐이었다. 마치 드라큐라처럼.-그런데 택배 상자를 열었을 때, 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낮에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저 꿈속이었으니 그랬겠거니 할 뿐.-

처음엔 그의 열정이 좋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이 좋았고, 온몸을 찌르듯 자극하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눈꼬리가 약간 처져 조금은 슬퍼 보이면서도 깊은 눈 속에는 무언가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내가 1년 넘게 남자친구가 없었고 섹스를 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도는 내가 아는 어떤 남자와도 다른 특별한 것이 있었다. 열정 외에 그의 테크닉도 그 누구와 견주지 못할 정도였다. 고슴도치가 그렇듯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아주 부드러운 전희부터 격렬한 섹스, 그리고 마무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강약 조절과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요니로 돌진해 제 욕구만 채우고 담배 한 대 피워 물고는 “괜찮았어?” 혹은 “좋았어?” 따위의 말 같잖은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섹스머신이 아니었다. 갑자기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는 점령군 타입이 아니라, 체위를 바꿔가며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파악해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난 절대 오랄은 안 해요, 절대로.”

첫날인가 둘째 날인가, 불쑥 내 코앞에 나타난 그의 링가를 보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날 이후 고도는 다시 오럴섹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도의 욕구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다. 2주일 정도가 지나자 아침 햇살이 제법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숨지 않게 된 것이다. 매일 퇴근하고 곧장 오피스텔로 가 출근할 때까지 섹스를 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자주 졸았고 코피도 쏟았다.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고도와 달랐다. 하지만 고도는 그런 걸 모른 척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욕망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어쨌든 해가 떠오를 때까지도 그의 링가는 곤두서 있었고, 손은 내 젖무덤 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햇살을 받으며 마지막 섹스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나자 고도는 내 출근 시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짜증을 내었다.

“아, 이제 그만해요. 난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흔들어대는 섹스 자동판매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자 고도는 잠시 멈칫하더니 구석자리로 가 몸을 웅크렸다. 웅크릴 때 수십 개의 정지 화면이 고도에서 고슴도치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마치 뒤샹의 그림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처럼. 거칠게, 그러나 선명하게.

한 꿈이 끝나도 다른 꿈이 계속돼 어쩔 수 없이 더 자야 하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에이, 도대체 언제 깨야 하는 거야? 요니가 아려왔다.

*

으응, 우리 딸 왔어? 그래, 학교에서는 재미있었니? 아니, 왜 그리 부어 있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애들이 놀렸다고? 널 거짓말쟁이라고 했단 말이지. 왜 애들이 널 거짓말쟁이라고 했을까? 응,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아파트 24층이란 걸 안 믿는단 말이지. 또 벽걸이 텔레비전도, 학교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피아노도 안 믿었다고? 아니야, 우리 딸이 왜 거짓말쟁이야. 그 애들이 잘 몰라서 그런 거야. 그 애들은 시골에서만 자라서 그런 것들을 보지 못했거든. 그럼, 그 애들보다야 우리가 훨씬 부자지. 그러니까 네가 좀 참아. 자, 가서 손씻고 와. 식탁 위에 있는 간식, 씻고 와서 먹어라. 응, 엄마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거든. 엄만 그것 좀 보고 있을게.

휴우, 그나저나 얘는 글이 왜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학교 다닐 때하고는 많이 다르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어휴, 낯 뜨거워. 뭔가 순탄치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잘 잘못 만났었나?

응, 그래, 손 깨끗이 씻었니? 식탁에 옥수수 쪄 놓은 거 있지? 그거 먹고 있어. 엄마, 이거 마저 좀 읽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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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찾아서> (4)는 5월 7일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