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미래》-김순천 외 10명, 삶이 보이는 창
하아무(소설가)
격렬한 부부싸움 끝에 곧 갈라설 것 같은 사람들이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어휴, 내가 새끼들 땜에 참는다.” 물론 요즘엔 다소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새끼들(!)이 눈에 밟히지 않는 부모가 많지는 않을 터이다. 이때, 새끼란 무엇인가. 부모의 분신이요, 미래요,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미래의 희망이 있기에 그 정도 고통은 참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미래가 부서져 버렸다면? 희망을 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면 어떨까. 이렇게 암울한 제목을 단 책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했다.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그 궁금증을 금방 풀어주었다. 진보생활문예를 표방하는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르뽀문학모임 회원들이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참 별스럽다. 먹고 살기 힘든 요즘 ‘아직도’ 진보생활문예를 표방하는 출판사가 있다는 것이 그렇고, 1980년대 쯤에 반짝하다 시들해져버린 르뽀를 ‘다시’ 들고 나온 것도 그렇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각한’ 이야기를 도대체 누가 읽을 거라고 돈들여 책을 펴낸 것도 그렇다. 하지만 별스럽기는 나도 별반 다르지 않기에 별스럽게 삐딱한 자세로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리고 곧 삐딱하게 기운 고개를 바로했다. 이 책은 규정하자면 <시사매거진 2580>이요, <그것이 알고 싶다>요, <인간극장>이다. 그 세 프로그램을 더해 놓은 것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1996년 WTO 시장개방 양허협정 발효 이후, 이른바 자본의 전쟁인 세계화는 가속에 가속을 더 붙여 우리를 엄습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어갔다. 이익 추구에 눈먼 자본주의는 더 낮은 비용에 더 높은 이윤을 추구했고,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가래침 뱉듯 던져버렸다. 회사를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노동자를 위해서 한 일은 없다. 쪽박까지 박살을 내버렸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삶이 상시화되고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인생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위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시대.
존재감마저 들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사는 가정복지도우미, 몸이 채 다 자라지도 않았던 열세 살 때부터 신문 배달, 자장면 배달, 가스 배달, 다방 아가씨들 오토바이 태워주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혼자 사는 아이, 연봉 600여만 원을 받는 영화 스태프, 아르바이트생보다 적은 시급을 받는 하청 노동자, 37만 원의 월급을 받는 대학 경비아저씨 등등.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말소돼버린 것을 안 노숙자가 “정말 내 자신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하는 장면에서는 명치 께가 아려왔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월급쟁이부터 자영업자는 물론이고 공무원들도 자주 그런다. 몇 십억 대의 건물을 소유하고 임대료 수입으로 사는 사람이 내 앞에서 한숨까지 쉬기도 했다. 솔직히 나도 자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 하지 않을 작정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 아닌가.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그리고 하는 김에, 전업작가에게 월급을 지급해 생계를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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