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마르셀 에메, 문학동네
하아무(소설가)
<벽뚫남>이란 뮤지컬이 있다. 아니, <벽을 뚫는 남자>다. 뮤지컬 붐을 타고 올해(2007년) 초부터 우리나라에서 상연되고 있다. 프랑스의 국민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단편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뮤지컬로 각색한 것이다. 이 뮤지컬 <벽뚫남>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누린 수작이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벽뚫남>은 소설로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뮤지컬보다 소설로 이미 소개가 되었다. 소설로 번역된 제목은 <벽을 드나드는 남자>다. <벽뚫남>이 아니라 <벽드남>인 셈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뚫는’ 것보다는 ‘드나드는’ 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다.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라고 번역한 이도 있지만, <육백만 불의 사나이> 류처럼 어설퍼 보인다.
어느날 뒤티유욀은 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벽 너머 다른 방에서 무슨 얘길 하는지 들을 수 있고,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신출귀몰한 능력.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어릴 적부터 <도깨비 감투>나 <투명인간>의 능력에 매료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왜 여기자를 성희롱했는지, 공천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 알아내기란 여반장이고, 청와대나 백악관인들 드나드는 게 어렵겠는가. 대운하가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광우병 우려 소가 어떻게 수입하기로 결정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티유욀은 자신이 독특한 능력을 지녔음을 확인하고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직장 상사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리고, 급기야 은행 금고를 털게 되면서 (뤼팽과 같은) 괴도로 이름을 날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 경찰에 체포되고, 자유자재로 탈옥을 감행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정직한 소시민 뒤티유욀은 결국 남의 집에 마음대로 침입하여 유부녀와 정을 통하기에 이른다. 종내에는 자신의 실수로 벽을 지나다 벽 속에서 응고되어 버리는 파국을 맞게 된다.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게 된 뒤티유욀이 점차 이성적인 판단력과 도덕성을 상실하게 된 것. 소박한 소시민에게 억제되어 있던 여러 가지 욕망들이 마구 분출됨으로써 가치관 붕괴가 일어났고, 그런 상황 아래선 파멸을 막을 길이 없다.
뒤티유욀의 파국을 보면서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건 왤까? 한 번 정치권력의 맛을 본 수많은 정치인들의 군상,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무서운 건 그들과 뒤티유욀의 파국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란 사실이다. 뒤티유욀처럼 벽에 갖힌 채 끝난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하지만 정치인의 파국은 한 지역사회, 나아가 나라마저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온 나라가 광우병 신드롬에 홍역을 겪고 불안에 떨게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그들에게 국민의 여론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협상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그들에게 국민의 건강을 백악관에 헌납할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그들 자신의 오만과 착각 때문이 아닌가.
제발, 도덕성을 팽개치면서까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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