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의 세계 통해 인간의 과거와 미래 읽어내기
<생물의 다살이>-권오길, 지성사
꺄악~! 비명을 지르고 아내는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후다닥,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제 엄마의 손을 붙잡고, 다섯 살배기 딸은 내 손을 잡아 끈다.
“아빠, 저기 바퀴벌레!”
4억 년 전 고생대 석탄기부터 살아왔다니 정말 독한 놈이다. 나도 바퀴벌레가 싫다. 벌레고 사람이고 간에 독종은 싫다. 책이든 슬리퍼든 내리치면 찐득한 흰 분비물을 내놓는 것이 싫고, 집안 곳곳에 바퀴약을 붙이고 뿌려도 다시 나타나는 천연덕스러움이 싫다. 그래도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형법 제 319조 불법 주거침입죄를 자행하는 녀석을 살려둘 수는 없다. 체면만 아니라면 그런 살생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 제발 나타나지 말아다오,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바퀴벌레를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이가 있다. 소위 생물학 박사란다. 사람이 지구에 태어난 게 1백만 년 전이니 바퀴벌레는 우리한테 한참 형님 뻘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네, 끄덕끄덕. 동생이 형님을 슬리퍼로 납작하게 두들겨 패 죽이다니 말이 되는가. 안 되지, 끄덕끄덕. 바퀴벌레도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한 고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존재 이유가 있지 않은가. 당연하지, 끄덕끄덕. 작디작은 벌레라고 제멋대로 해충이니 익충이니 나눈 것은 사람의 오만방자함 때문 아닌가. 인정, 끄덕끄덕.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니 모두들 서로를 인정하며 사세. 당근이지, 끄덕끄덕.
희한하네. 읽다보니 그놈들한테도 그들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깟 미물들에게 무얼 배워?(배울 게 없기만 해봐라, 이 책으로 바퀴벌레를 힘껏 때려주리라!)
흡혈박쥐는 떼지어 먹이사냥을 나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와 배곯는 놈이 있으면 십시일반으로 피를 조금씩 토해 먹인다고? 허허, 보기보다 대견한 놈들일세. 펭귄은 어미가 알을 낳을 때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컷의 털이 난 두 발 위에 낳는데, 부화하는 60일 동안 수컷은 꼼짝 않고 서 있기도 한다고? 어허, 그거 대단한 부성애일세. 호주산 개구리 중에는 암놈이 자신의 수정란을 모두 둘러 마셔서 제 위 속에 넣고는 새끼를 키워내는 녀석도 있다고? 햐, 우리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저 모성애.
2년 간 사막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버티는 개구리, 곰팡이나 진딧물을 농사짓듯 제 손으로 길러서 먹는 목축개미, 납중갱이와 조개는 서로의 껍데기와 비늘에 알을 낳아 공생한다고? “넓고 크게, 전체를 둘러보면 모두가 공생이고 상생이다. 남에게 들러붙어 사는 기생도 알고 보면 공생이다. 못난이 덕에 잘난 놈도 있는 것처럼.”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네. 아이고, 이 책으로 바퀴벌레 잡으면 안 되겠다.
지은이를 볼까. 권오길.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진주고 졸업, 현재 강원대 교수(멀리도 가셨네). ‘원숭이도 읽을 수 있는 글’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 매년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 지금까지 20여 권에 이른다. 대단한 열정이고 정력이다. 존경스럽다. ‘권오길식 글쓰기’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쉽고, 유려하며, 재미있다. 게다가 달팽이를 얘기하면서 영국 시인 브라우닝을 끌어들이고, 주꾸미와 한승원의 시를 함께 얘기한다.
작디작은 미물의 세계를 통해 삼라만상을 보고 생명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읽어내는 노학자의 눈이 맑다.
하아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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