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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피 흘리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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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얄미운 발렌타인≫, 조명숙/문학사상

개인적으로, 최근 2주 사이에 집안 어른 두 분이 돌아가시는 일을 당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했지만, 두 분에게는 안타깝게도 길이 오직 하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삶이었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다가 노년에 덜컥 중병이 들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유난히 무더운 여름날 세상과 작별을 고한 것이다.

장례식장 한 켠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고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결국은 누구나 당하게 되는 일, 죽음. 하지만 대개는 잊고 살아가거나 애써 외면한다. 그러다가도 신문 사회면이나 사건․사고 뉴스에 나온 끔찍한 기사를 보고 “살아있음의 치욕스러움”에 새삼 치를 떤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이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의 얄미운 발렌타인≫에는 여러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리라는 턱없는 믿음”(<흰 각시거울>), “몰래 출산한 아이를 비닐봉지에 싸서 옆집 옥상에 버린 여학생”(<미즈 맘>), “살아 있음의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갖는 믿음”(<소리의 덫>), “사고든 전쟁이든 폭력이든, 그냥 끝나는 것”(<살고 싶도록 죽고 싶도록>) 등.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몸들이 낭자하게 피를 흘린다”는 작가의 말은 직설적이지만 정확하다.

작가는, 삶이란 저마다 발산하는 기호들이 해독되지 못하고 부딪치고, 그때 발생하는 스파크가 배합된 모래밭이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이해받지 못하고, 소통마저 끊기거나 원활하지 못한 ‘모래알’들이 7편의 중․단편에서 각자의 사연을 조근조근 풀어놓는다.

그것은 조문객들이 술잔을 들며 회상하는 망자의 이야기와 닮았다. 각자 기억하는 사연들은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고통이 전해져 오기도 하며, 통곡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연은 이해받지 못하고 단절되기 일쑤며, 그리하여 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지만 언제 어느 때 누군가가 내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못다 한 말이 만들어놓은 참을 수 없는 심연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되뇐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유태인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한 그 희망(로고테라피, Logotheraphy)처럼.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끝까지 허물어지지 않으며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발인을 마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생각한다. 수없이 스러져간 ‘모래알들의 아우성’이 있었기에, 그래,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도 우리는 더더욱 그 아우성들을 기록하고 더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아무(소설가)

나의 얄미운 발렌타인 상세보기
조명숙 지음 | 문학사상사 펴냄
《헬로우 할로윈》,《우리 동네 좀머씨》의 작가 조명숙의 세 번째 작품집.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누구나 잊고 살아가는 죽음을 중심소재로 한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죽음들을 다루며 남아 있는 자의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죽음이 자신과 무관할 거라는 턱없는 믿음(<흰 각시 거울>), 살아 있음의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전율 아닌 것이 분명 있으리라는 희미한 믿음(&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