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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해질녘 남강가를 조용히 걷는 느낌의 소설

“내용은 없는데, 점점 빠져들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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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장 필립 뚜생, 고려원

사람 중에 겉은 반지르르 하고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알고 보면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이가 있다. 척 봐서 꾀죄죄하고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왠지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이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장정이나 디자인이 화려하고 유명세를 타는 지은이에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이지만 몇 줄 읽다가 던져버리게 되는 책이 있고, 전혀 생소한 지은이의 정말 소박하기 그지없으나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 있다. 《사진기》는 바로 후자와 같은 책이다.

이 책을 낸 출판사가 망하고 난 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떨이’로 팔 때 산 책이다. 그렇게 몇 권을 샀는데, 읽을수록 그 출판사가 겪은 불행에 나는 몇 번이고 안타까워 몸을 떨었다. 다행히 다른 출판사에서 판권을 확보해 계속 나오고 있는 책도 몇 종 있지만, 대부분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책도 불운한 책들 중 하나다.

프랑스에서 ‘작가의 재능만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소설,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유럽에서 ‘미니멀리스트’라거나 일본에서 ‘선(禪)소설’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이의 평가가 내 느낌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저녁 노을 없는 저물녘 인적이 드문 남강가 진주성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정말 “언어 기호가 영상 기호보다 화면적으로 풍부한 울림을 가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독자들이 직접 확인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만큼이나 주인공 역시 독특한데, 무슨 일이든 해야 할 때 재깍 하는 법 없고 느릿느릿 미루고 미루었다가 마지못해 한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나른한 인간이어서 그런 거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뭔가 한두 가지가 빠져 있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을 보고 ‘멍청한 상품’이라기도 하고,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과자를 먹는가 하면, 운전교습소 강사의 친절도 ‘신경을 거스르는 천사 같은 미소’로 본다.

주인공은 속으로 말한다. ‘이런 나른함, 이게 사랑일지 누가 알랴.’ 그래서 천부적인 나른함을 지닌 여자 파스칼과 비몽사몽간에 깨어 정사를 하면서도 생각은 딴 데 가 있다. 도대체 양말 한 짝이 어디로 갔느냐는 거다. 그러다가 별 의미 없이 발작적으로 남의 사진기를 훔쳐 마구 찍어댄 다음 사진기를 바다에 던져 버린다.

작가의 세계인식은 사진기의 내부처럼 어두운 공간인데, 그 어둠 속에서 독특한 발상과 행동, 주절거림으로써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주인공이 인화된 필름에서 우연히 찍힌 파스칼의 모습을 본 것처럼.

우리는 어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어떤 어둠을 주시하고 어떤 유의미한 것을 찾으며 살아가는지, 봉인된 세계 속에서 (우리) 눈먼 존재의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 가을에, 곰곰이. (나른하게 겨울잠을 자면서?)

하아무(소설가)

PS-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쓴 글인가보다. 정확하지는 않다.

사진기 상세보기
장 필립 뚜생 지음 | 고려원 펴냄
운전교습학원에서 파스칼이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주인공의 내면세계가 섬세하게 묘사되는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