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속 궁둥이 VS 소설 속 궁둥이
<궁둥이>-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열린세상
궁둥이 닮은 버즘나무가 민망하다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점잖은 소설가가 ‘궁둥이’에 집착하는 것만큼 민망할까.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표지엔 알궁둥이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다. 책을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필사적 몸부림이다.
하지만 원래 제목이 <궁둥이>는 아니다. 원제는 <새엄마에 대한 찬가> 혹은 <계모 찬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그것보다는 <궁둥이>가 더 자극적이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제목이라서 붙였겠지만, 궁둥이에 집착하는 작가의 취향을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초기 그의 작품세계는 중남미 사회의 특수성, 닫혀진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다 80년대 이후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과거 그가 즐겨 다루어왔던 사상과 이념의 도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재미로서의 소설’이라는 중남미 문학의 특징을 구현하는 것으로 바뀐다.
등장인물은 세 명 남짓하고 내용도 아주 간단하다.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와 육체를 소유하고 대단히 개방적인 현대 여성으로 등장하는 새엄마 루끄레시아. 작가에 의해 천사의 용모로 수식되는 동시에 소설의 내용을 불행으로 이끄는 어린 악마 알폰소. 에로틱한 삽화의 수집광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진 채 매일 밤마다 자신의 육체 부위 하나하나에 대해 무슨 의식처럼 청결한 위생작업을 치르는 남편 리고베르또. 40번째 생일을 맞은 새엄마의 궁둥이를 사랑하는 소년 알폰소를 중심으로 성의 내면적 충동, 도덕적 타락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말초적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노벨문학상 후보 체면이 있지! 남미 특유의 문학적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줌과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시인, 소설가 또는 비평가의 이름을 빌려 서술되는 그들의 고상한 기호나 괴팍한 취미와 짤막한 수상은 작가의 문학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충분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미술 작품을 성적 유희를 위한 자극물처럼 사이사이에 배치하고 주인공의 내면 심리와 일치시켜 나간 창작기법이라든지 다인칭 시점의 교차, 대화와 대화 간의 교차, 문체의 난삽함이나 시제의 혼선 등은 그의 문학적 자존심의 표현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작가이지만, 1990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까지 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 그의 이력에 대해 고개를 주억이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비록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지만, 우리로서는 맹랑한 아이가 등장하여 새엄마의 궁둥이를 사랑한다는,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것으로 매도당할 수 있는 소설을 써낸 작가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중남미의 낙후된 정치•경제적 현실을 감안해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했겠지만 기본적인 입장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궁둥이를 닮은 인터넷 속 버즘나무도, 바르가스 요사도 우리에게 궁둥이를 들이밀고 있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지 않은가. 그게 인터넷과 문학의 차이다.
하아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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