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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그는 미쳤다, 그래서 재미있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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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강판권, 지성사

이 책의 지은이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교정에 있는 나무를 세면서 공부를 하고, 학생들에게도 나무를 세어 오라는 과제를 내어준다. 은행나무를 세어 보라는 둥, 메타세쿼이아를 세고 느낀 점까지 써서 제출하라는 식이다. 그리고 야외 수업을 공지하고 벽오동 아래로 나오라고 지시한다.

당연히 푸념이 터져나오고 벽오동을 찾지 못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쯤 되면 분명해진다. 지은이는 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슬그머니 자신이 정신이 나가 미친 게 아니라, 어떤 의도에 의해 어떤 일 한 가지에 미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대다수 사람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친(!) 그를 우러러본다. 뻔하지 않은가.

그가 나중에 내보인 카드는 나무를 통한 역사 배우기다. ‘역사와 신화 속에서 걸어나온 나무들’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제시한 그대로다. 빤한 노림수와 죄없는 학생들을 자신의 얄팍한 교수법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괘씸하지만(초등이나 중학생에게라면 모를까),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다. 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굳이 몸고생을 시키지 않았어도 가능했을 텐데.

나무와 역사를 접목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군신화로 예를 들면, 신단수의 ‘단(檀, 壇)’을 태백산 혹은 박달나무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자신은 박달나무로 본다는 것. 그러면서 박달나무가 어떤 나무이며,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와 쓰임새를 가진 나무인지 등을 설명해가는 형식이다.

고로쇠나무 편에서는 캐나다단풍과 중국단풍, 당단풍, 노무라단풍 등과 고로쇠나무의 차이를 세세히 비교하고 사진까지 제시한다. 신라와 백제군이 전투를 하던 중 고로쇠물을 마신 신라군이 승리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는 우리나라 전설과, 검은머리 공주가 금발 공주를 시기해 죽이고 단풍나무 아래 묻었다는 서양의 옛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방법으로 달 속의 계수나무, 사람도 사랑도 낳은 대나무, 천연기념물 제1호 측백나무, 불교미술의 비밀을 간직한 향나무, 게으름의 미학을 일깨워준 석류, 양귀비보다 배롱나무를 더 사랑한 당 현종, 봉황을 기다리는 벽오동 등 나무를 중심으로 관련된 역사와 신화를 불러내오는 것이다. 단지 나무에 얽힌 지식을 모은 것이 아니라, 나무를 통해 새롭게 역사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이렇듯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에서도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인문학자가 나무를 통해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더한 것은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를 넓히고 깊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 상세보기
강판권 지음 | 지성사 펴냄
나무를 통해 역사 해석하기. 성리학적 격물치지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가까이 있는 주변의 사물을 살피는 공부가 있다. 이른바 근사의 공부방법. 저자는 이 책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논란이 되고 있는 지금, 인문학 부흥을 위한 새로운 공부론으로 '나무세기'를 제시하면서 나무를 통해 역사를 고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