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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섬진강/지리산’ 그 자체가 되려했던 시인, 작가들

현실과 이상, 죽음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계
-한국 현대시 속의 ‘섬진강-지리산’<프롤로그>

김수영 시인을 매료시킨 작가

 

우루과이 출신의 프랑스 작가 쥘 쉬페르비엘은 남미의 대초원에서 말을 타고 끝없이 질주한 다음 이렇게 썼다.

“그 넓은 초원은 내게는, 다른 감옥들보다 크기는 해도 감옥의 모습을 띠었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에서 재인용, 민음사, 1990)
‘외부에서의 현기증’을 체험한 그는 “너무나 넓은 공간은, 공간이 충분히 있지 않을 때보다 우리들을 훨씬 더 질식시킨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쉬페르비엘은 인간의 육체와 전 우주에 걸쳐 생명의 무수한 박동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으로, 김수영 시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는 것 같은 속된 호기심을 선동하는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료”(김수영, 산문 <새로움의 모색> 중에서, 민음사, 1990)된 시인이라 말한 바 있다.

쉬페르비엘의 초인 같은 미소, 창조에 대한 사랑

 

김수영의 고백이 아니라도 쉬페르비엘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남아메리카의 광활한 대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의 우주적인 동포애에 대한 향수 등으로 유명하다.
김현 문학평론가도 “(쥘르 쉬뻬르비엘의) 초인 같은 미소, 창조에 대한 사랑도 그 대평원의 영향”이라며 “시인은 죽음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계를 여유 있게, 노래처럼, 그려내고 있다”(김현, 《현대 대표시인선집》 해설 중에서, 중앙일보사, 1982)고 평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쉬페르비엘이 말하는 ‘넓은 초원=감옥’ 혹은 ‘넓은 공간=질식’은 무슨 말인가.
감옥은 사전적으로 ‘징역형이나 금고형 등을 선고받아 복역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한 번 갇히면 여간 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공간, 쉬페르비엘에게는 몸은 비록 프랑스에 있어도 의식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남미의 드넓은 초원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자연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체감을 느끼면서 멀미와도 같은 아찔한 현기증, 숨이 막힐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됨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자연에 대한 친화력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 정서

이는 비단 ‘삶의 상상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쉬페르비엘의 경향만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친화력은 이미 고대로부터 자연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지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가 아닌가.
자연 속에서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과 그것을 바라보는 실제의 삶이 결부되는 방식에 따른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어쩌면 현대인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이나 열망은 이미 그것으로 유명한 쉬페르비엘 그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특급 울트라캡숑’ 강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나 ‘섬진강-지리산’은 쉬페르비엘이 평생 남미의 넓은 초원을 그렸듯이, 이 땅의 수많은 작가들이 그곳에서 현실과 이상, 죽음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았고 기꺼이 그 세계를 받아들여 글로 쓰고 노래하고 그려내었다.

마치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 <타자(他者)>에서, 케임브리지 찰스 강가에서 노년의 보르헤스가 젊은 날의 자신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수많은 작가들도 섬진강과 지리산에서 타자를 만나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그들 수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섬진강이 되고 지리산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이 섬진강 은어가 되고 재첩이 되고 모래알이 되고, 지리산의 고사목도 되고 노루도 되고 으아리꽃도 되어 눈 마주치면 시 한 수 읊을 것만 같다.

가만히,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자연과 악수하는 태도, 청결무구"

이태준이 명저 《문장강화》에서 “자연과 악수하는 태도, 그러자면 자연계의 모든 것도 한 마리의 곤충이라도 , 한 포기의 풀이라도, 모두 우리 인생과 함께 목숨이 있고, 목숨을 즐기는 생활자들이거니 생각하면 새삼스런 그들에의 존경과 친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거니와
“이렇게 친애를 가지고 본다면 일초일충(一草一蟲), 정 쏠리지 않는 것이 없다. 정이 쏠리면 그에게 무시할 수 없는 감상이 일어날 것이요, 감상이 일어나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또한 인정의 본능이다. 더구나 자연에의 관조처럼 청결무구한 감상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담고 있는 솔직한 이야기를 ‘존경과 친애’를 가지고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