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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옛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그 맛이 구수하고 감칠맛 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어쩌다 아이들에게 한 자락 들려줄 것 같으면 "낄낄낄" "하하하" 자지러지기 일쑤다.
어느 자리에서 풀어놔도 옛이야기 싫다는 사람 별로 없고, 다들 재미나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중한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다.
깔깔웃음, 너스레웃음, 넌짓웃음, 눈웃음, 떼웃음, 마른웃음, 살웃음, 선웃음, 볼웃음을 짓게 하는 우리 옛이야기.
당차고 뻔뻔하고 야멸차면서도 해학과 외설스러움이 담뿍 묻어있는 우리의 옛이야기.

그 무궁무진한 이야기 세상으로 들어가본다.

이야기 하나.

태봉(泰封)의 왕 궁예(弓裔)가 젊어서 중노릇하던 때의 이야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칠장사 명부전에 그려진 궁예의 모습


산중에 들어가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면 불경 외고 참선하는 것이 본분일 터.
하지만 궁예는 그런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밤낮 산으로 들로 다니며 사냥을 다녔다.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아야 함은 물론, 살생은 더더욱 금기인 터에 활을 메고 사냥을 다니니 절에서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 번 사냥을 나가면 제때 잘 들어오지도 않고 제멋대로였다.
그날도 아침 일찍 활을 메고 절을 나간 궁예는 해가 떨어지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공양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않자 중들은 속이 상해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제법 결기가 있는 중 하나가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저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으세."
눈엣가시 같은 궁예의 버릇을 고쳐두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들 이심전심.
"어떻게?"
모두의 생각을 안 그 중은 제안을 했다.
"녀석이 제 밥을 챙겨두지 않으면 지랄발광을 할 터이니..."
그 중의 제안에 모두들 찬성을 하고 그렇게 해두었다.

이윽고 궁예가 밤늦게 꿩 두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옛다! 이건 내일 내 밥상에 올려라. 원, 고기도 안 먹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사냥해온 것을 공양간에 던져주고 궁예는 허기가 진듯 밥을 찾았다.
"그나저나 내 밥 내와라. 배고프다."
그러자 중들이 이구동성, 합창을 하듯 궁예의 방을 가리켰다.
"방에 준비해 두었수."
궁예는 "허허" 웃으며 기꺼워했다.
"허허허, 녀석들. 오늘 무슨 날이냐? 제비 새끼들처럼 똑같이 입맞춰 외치다니, 재주들 좋구나."

허허 웃으며 방에 들어간 궁예는 순간 멈칫했다.
방 한가운데 밥을 둘둘 뭉쳐서 아무렇게나 던져둔 것이 분명했다.
그 뒷모습을 밖에서 보고 있던 중들은 모두들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다.
'어떠냐, 이놈. 네가 신성한 절에서 멋대로 군 대가다.'
'이놈, 이 불한단 같은 놈아. 오늘은 꼼짝 못 하겠지?'
'네가 부처님 손바닥에서 뛰어야 벼룩이지. 이젠 뭘 어쩌겠니.'
'흐흐흐, 고소하다 고소해. 쌤통이다 욘석아.'

찰나, 궁예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곧장 몸을 돌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저봐, 삐친 것 맞지? 그렇지?"
"그런 것 같아. 우리는 수가 많으니 뭐라 하지는 못하고 내빼는 것 좀 봐."
"그럼, 지까짓 게 화가 난들 어쩌겠어. 낄낄낄."

그런데 궁예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제 키만한 물동이에 물을 잔뜩 담아 들고온 것이었다.
'어어어, 저건 뭐 하려고?'
'어휴, 정말 힘은 장사네.'
모두들 아무 소리 못하고 어쩌나 보고 있는데, 궁예는 물동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많은 물을 방바닥에 몽땅 쏟아버렸다.
보다 못한 중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야 이놈아. 이 미친 놈아. 왜 멀쩡한 방에다가 물을 처붓니?"
"그래, 이놈아. 너만 자는 방이냐? 다들 어떻게 자라고 이러냐?"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정말 못 말리는 인간 망종이다."

그러자 궁예는 껄껄 웃으며 변죽 좋게 말했다.
"나 밥 말아 먹을라고 그런다. 왜, 떫냐?"

안 떫다. 재미있고 유쾌하다. 이것이 우리 옛이야기의 맛이다.
웬만한 코미디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더위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