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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눈 앞에 두고도 못 보는 보물들

명견만리(明見萬里)

보물을 눈 앞에 두고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명견만리(明見萬里),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알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처음부터 주어지는 능력도 아니다.
관찰력을 길러야 한다. 주위에 하찮아 보이는 것도 잘 살펴보면 의외로 그 가치가 만만찮은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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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땅에 나는 온천수도 모르고...
옛날 충청도에 가난하지만 매우 부지런한 농부가 살았다.
어느 날, 농부는 아침 일찍부터 지게로 두엄을 져다 날랐다. 땅이 척박해 버려두다시피 한 자갈투성이 논을 근근히 모아둔 돈으로 샀기 때문이다.

“힘들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할까?”
농부는 허리춤의 쌈지에서 담배를 꺼냈다.
“휴우, 이제 하루 이틀이면 끝나겠군.”
농부는 흡족한 마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거름을 충분히 내어 땅힘을 되살리면 당장 올해 벼를 심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농부는 담뱃대를 빨면서 무심코 위를 쳐다보았다.
농부는 자기 머리 위로 하얀 학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 웬일일까?”
먹이도 부족하고 둥지를 틀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아 이 마을에서 학을 보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렇게 쌀쌀한 날씨에 학이 날아와 있으니 더욱 이상스런 일이었다. 게다가 그 학은 나는 모습도 온전치 않아 보였고, 굼부럭굼부럭 걷는 것도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농부는 학이 하는 짓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학은 농부의 논에서 1백 걸음 정도 위에 있는 수풀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머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다 보곤 했다.
“저기에 뭐가 있는 겐가?”
호기심이 난 농부는 담배를 끄고 그 자리에서 까치발로 건너다보았다. 그렇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참, 알 수 없는 일이군. 필경 무슨 까닭이 있을 터인데…….”

“엉? 저기에 샘물이 있었나?"
농부는 학이 하는 짓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수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날개 끝으로 한 번, 부리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물을 찍어 다리에 바르는 것이었다.
“엉? 저기에 샘물이 있었나? 난 여태 보지 못하였는데.”
농부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학은 물을 찍어 바르는데 열중해선지 농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저런 쯧쯧, 다리를 많이 다쳤구나. 아주 부러져버린 것 같은데.”

농부는 다가가 그 학의 다리를 싸매어주고 싶었지만 농부를 보면 그냥 달아날 것 같아 보고만 있었다. 얼마 뒤 학은 한쪽 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건너편 산 쪽으로 날아갔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군. 물을 바른다고 낫는 것도 아니련만, 쯧쯧쯧.”
농부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학이 있던 웅덩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농부는 같은 샘가에서 또 그 학의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학은 언제나 다리에 물을 찍어 바르다 날아가곤 하였다.
보름쯤 되는 날이었다. 농부는 그 날도 샘가에서 바로 그 학을 보았다. 농부가 가까이 다가가자, 학은 물을 찍어 바르던 일을 멈추고 농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놀란 듯 펄쩍펄쩍 뛰어 언덕 위까지 달아났다.
“허허, 내가 괜히 방해를 한 모양이군.”
농부는 학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러진 학의 다리가 말끔히 나았는데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이 다쳤던 학이 뛰어 달아났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학은 그런 농부에게 자기의 다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느 날처럼 곧장 멀리 날아가지 않고 농부 주위를 두어 바퀴 돌다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때 농부는 쭉 뻗은 학의 다리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니, 다리가 말끔히 나았잖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저 샘물이? 에이, 아닐 게야. 처음부터 크게 다친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농부는 어떻게 학의 상처가 아물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샘물 때문인지 아닌지 정확한 것도 아니어서 확인될 때까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농사철이 다가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일곱 살 난 아들을 가리키며 걱정을 했다.
“등에 부스럼이 났는데 점점 더 퍼지기 시작해 큰일이에요.”
농부가 아들을 불러 살펴보니 등에서 시작된 부스럼이 목으로, 얼굴로 옮아가고 있었다. 부랴부랴 집에 있던 고약을 발라 보았지만 낫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등에 난 부스럼은 곪아갔다.
“이거 큰일인걸.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이 근동에는 의원이 없으니.”
급기야 아이를 업고 재를 두 개나 넘어 의원에게 보였지만 그마저도 허사였다.

“증세가 너무 심하여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네.”
다시 아이를 업고 되돌아오면서 농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집이 가난하여 늦게 장가들어 어렵게 낳은 아들인 데다가, 열심히 일하여 돈 많이 벌면 잘 먹이고 잘 입히겠다고 그동안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등에 업힌 아이는 연방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때 멀리 김부자에게서 산 자갈투성이 논이 눈에 들어왔다.
“척박한 논을 공들여 비옥하게 하면 무엇하나. 아들 하나 있는 게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때 농부의 눈 앞으로 무언가 휙 지나가는 듯하였다. 눈물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학 같은 것이 자신의 논 쪽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신기한 일이 있을 수가!”
“아! 그 샘물.”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지! 여태 내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농부는 그때서야 부리나케 논 위쪽에 있는 샘으로 아들을 업고 달려갔다. 그리고 지난번 학이 하던 것처럼 손으로 샘물을 찍어 아들의 부스럼이 생긴 곳에 발랐다. 효험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열심히 발랐다.

그날부터 농부는 날마다 한 차례씩 그 샘물을 발랐다. 그렇게 한 사흘을 계속하자 부스럼이 천천히 아물기 시작하더니 열흘쯤 되는 날에는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았다. 부스럼은 물론이고 곪았던 상처도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없어졌다.
“이렇게 신기한 일이 있을 수가!”
농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들을 얼싸안았다. 그 학도 기뻐하며 농부의 머리 위를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부는 그 길로 마을에 달려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니, 자네 지금 잠꼬대하고 있는 겐가?”
“글쎄나 말일세. 아니 세상에 샘물로 부스럼이 낫는다니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나?”
“에잇 고얀 것 같으니. 성실하게 일해서 괜찮은 사람으로 봤더니 우리가 잘못 보았던 게로구먼.”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농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모두들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만 하였다.
“내 말을 그렇게 못 믿겠다면 부스럼이 난 사람은 나와 함께 가서 시험을 해 봅시다.”
농부는 이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 학의 상처와 아들의 부스럼이 우연히 낫게 된 건 아닐까? 아냐, 이건 틀림없이 그 물의 약효 때문일 거야.’

농부는 생각 끝에 억지로 마을의 환자 한 사람을 데리고 그 샘가로 갔다. 그 사람도 얼굴에 난 부스럼에 샘물을 바르자, 며칠 뒤에 깨끗이 나았다. 그때서야 마을 사람들도 농부의 말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부스럼이나 피부병이 생긴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샘물로 치료를 하였다. 그 소문은 차츰 이웃마을에서 또다른 마을까지 퍼져 사방에서 구름처럼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고을 원님도 농부에게 큰 상을 내리고, 그곳에 움막을 지어 환자들이 차례대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농부의 관찰력으로 많은 백성들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동리에서 전해오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 뒤 1918년경 그 웅덩이 물은 온천수로 밝혀졌다. 지금은 그 자리에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