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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설

달맞이꽃(연재6)그녀는 모험을 위해 길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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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도무지 내 팔에서 가슴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약간은 의식적으로 가슴을 슬쩍 눌러도 그녀는 전혀 피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슴을 들이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내가 거미여인에게 붙잡힌 작고 힘없는 벌레일지도 몰랐다. 벗어나기는커녕 꼼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 커피숍에 도착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흔히 말하듯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는 식은 아니었다. 단지 거리가 너무 짧았을 뿐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곧 커피숍이 나타났는데, 한두 번쯤 가보았던 곳이었다. 지하에 열 개가 채 안 되는 탁자가 사람이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히 배열되었고, 한번씩 탁자와 의자를 몽땅 치워 한쪽에 무대 아닌 무대를 설치하고 관객을 습기찬 바닥에 주저앉혀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다. 주인의 후배인 듯한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독일 작품 위주로 공연을 하였다.

그곳에서의 일은 그다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잠에서 덜깬 주인이 나왔고 그녀가 자기 손으로 셔터를 올렸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형,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인사도 아닌 말을 던지고 저 먼저 들어가 주방 가까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이라 불린 주인도 그저 “왔냐?”는 말을 대충 흘려 말하고 당연한 것처럼 주방에 들어갔다. 자주 있어온 일이라는 듯. 하기야 아침에 눈뜨자마자 담배를 피우고 싶어 잠자던 차림 그대로 나온 그녀가, 눈뜨자마자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날인들 없었겠는가.

주인이 커피를 끓여 내왔고 우리와 같이 그것을 마셨다. 레몬을 곁들인 에스프레소 커피였는데, 텁텁해 있던 입맛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별로 기억나는 얘기를 나누지 않았고 술과 담배 얘기만 조금 했던 것 같다. 그리곤 곧 헤어졌는데, 주인은 더 자야겠다고 했고 그녀는 아빠의 아침점호를 위해 집에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

그 날 이후,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체취는 더욱 선명해졌고 미완의 자유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리 속을 맴돌았다. 여름방학이 다 가도록 매일 그 강둑으로 나가 달맞이꽃이 피었다 지는 걸 지켜보았다. 달맞이꽃 옆에서도 그 많던 이름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한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것은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모험을 위해 길을 떠났을까?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존재를 찾아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을까? 단순히 배를 불리기 위한 도약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떤 활기를 찾아서.

그러나 물 밖 30Cm 이상을 뛰어오른 물고기도 그 순간을 지나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녀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물고기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뛰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날의 일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일이었으므로 그녀 역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한 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그때 내가, 아니 그녀까지도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한 달여의 새벽이 지나고 가슴은 지날수록 생생한데 모습은 점점 더 가물거렸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나 학번, 학교, 학과, 뭐 하나 알고 있는 게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유일한 단서인 그 지하커피숍을 찾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주인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 날 아침의 일을 이야기해도 딱히 기억나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내가 설명한 그녀의 말과 행동, 인상착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아아, 그 애. 연극 공연 있을 때 오곤 했는데, 뒷풀이 때도 남아 술을 마시기도 했어. 공연 전후에 준비나 뒷정리를 도와주기도 해서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나도 그 애 이름이나 학번 같은 건 몰라. 글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애가 날 찾아오기는 했지만 내가 다가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여러 차례 만나면서 어쩌면 이름도 모를 수 있느냐고 공박할 수 없었다. 만난 횟수나 친밀도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날 새벽 이후 한두 차례 더 커피숍을 찾은 이후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연극단원들과 그녀를 알만한 사람에게 수소문해 보겠다고 했지만 얻은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 억측과 실없는 헛소문만 낳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애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어.”

“나는 한 번씩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언니이’ 하고 부를 것 같아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니까.”

“겉으로는 활기차 보이면서도 어딘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어.”

“그래, 맞아. 늙은 졸부에게 팔려간 처녀 같은, 아니아니, 집안의 반대에 부딪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표정이랄까.”

“창백한 얼굴이 불치병에 걸린 것 같기도 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얼마 안가 그들조차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커피숍이 문을 닫았고 그들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보고싶어 해서 나를 찾을 것이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 후에 혼란스러움이 많이 가신 채로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