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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평전>김상훈 시인(3)방과 후엔 독선생 모셔다 한학 과외

<시를 통해 본 시인의 삶>

(3) 완고한 아버지와의 대립

 

양아버지(이하 아버지로 표기) 김채환은 김상훈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는 큰집에 양자로 입양한 몸이었다. 그렇게 종손이 되어 대를 잇기는 했으나, 정작 자식을 낳지 못해 손이 귀한 집안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 하였다. 종손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책임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번민이 컸으리라는 것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일찍 한학을 공부하였고 유교적인 생활 관습이 몸에 배어 살아왔다. 이런 부분들이 복합되어 아버지는 상훈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특히 자식 교육에 있어서 완고했는데, 상훈은 독훈장을 모신 독서당에서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공부해야 했다. 이런 환경 아래 상훈은 일찌감치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떼었고, 덕분에 “신동이 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컸다.

“학교에 보내주마. 단, 조건이 있다.”

그렇지만 상훈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유풍(儒風)에 젖은 아버지에게 한글로 교육하는 학교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고, 진서(眞書)를 익혀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상훈과 아버지는 처음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웃어보이던 아버지
머리 씨다듬어 착한 사람 되라고
옛글에 일월같이 뚜렸한 성현의 무리 되라고
삼신판에 물 떠놓고 빌고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을 조술하더니
-시 <아버지의 문 앞에서> 중 일부

아버지는 상훈이 “말 배울 적부터” 늘 죄 짓지 말고 “착한 사람 되라고” 강조하고, 여러 진서에서 밝힌 바대로의 “일월같이 뚜렸한 성현의 무리 되라고” 강조에 강조를 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때의 정전법(井田法)을 조술(祖述, 선인(先人)의 설을 본받아서 서술하여 밝힘)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진서는 경전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완고한 아버지와 대립이 가능했던 것은 상훈에게 항상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어머니가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학교에 보내주마. 단, 조건이 있다.”

마침내 아버지는 조건부 입학을 허락했다. 적령기가 2년을 넘긴 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떼었을 무렵이었다. 조건이란 다름 아닌 방과 후에는 진서를 계속 면학한다는 부자간의 약조였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란 것은 시답잖은 것으로 진짜 공부가 아니니 집에 와서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이었다.

어린 상훈에게는 고역이었으나,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상훈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고 학교에도 가보고 싶었다. 결국 상훈은 아버지와 단단히 약조를 하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우렁찬 종소리에 발을 맞추어
배우자 우리들은 이 땅의 아들
동무도 선생님도 정다운 집안
손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자

가야산 구름 위에 높이 솟았고
오곡이 무르익는 가조 들 복판
우뚝 선 우리 학교 우리의 자랑
우리들의 힘으로 길이 빛내자
-<가조초등학교 교가>

상훈이 직접 쓴 가조초등학교 교가의 노랫말이다. 자신이 다닌 학교였던 만큼 6년간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표현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고 솟은 가야산과 푸른 가조 들판, 그 가운데 자리를 잡은 학교와 선생님, 학생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노랫말을 지은 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불리워지고 있는 교가다. 물론 교가 노랫말의 특성상 자신의 생각을 모두 드러낼 수는 없다. 그래서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내용으로 밝고 맑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학교에 입학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된 기쁨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익힌 한학, 상훈의 자산으로

방과 후에는 한학을 익히는 데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것이기는 했어도 본래 상훈의 성정이 어질고 착한 데다가 학문에 대한 관심과 탐구욕이 남달라 곧잘 책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신동 났다”고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소년기의 추억은 즐겁듯이 상훈에게 있어서도 가조보통학교 6년간은 꿈같은 시절이었다. 늦입학으로 덩치도 큰 편인데다 성적은 언제나 수석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변신의 일생과 갈등의 시>, 정영진, 문학사상, 198호, 1989)

특히 힘겹게 공부해 쌓았던 한학 실력은 뒤에 상훈 자신에게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난세를 살아야 했던 그에게 아이러니컬하면서도 흥미로운 이 사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