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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평전5/김상훈 시인-"자식 노릇 안 할랍니다" 선언

(5) 사별로 끝난 첫 결혼, 그리고 진학을 위한 단식농성

1933년, 당시 열다섯 살이던 상훈은 가조보통학교를 4회로 졸업했다. 상훈은 다른 친구들처럼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학교도 조건부로 보내준 아버지는 더 이상 신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다며 진학을 단호히 반대했다. 애당초 아버지와 약조를 하였기 때문에 상훈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진학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시대로 서당에 계속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연전 시절의 김상훈


아버지는 곧 아들을 결혼시킨다. 집안의 귀한 종손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외에도 아들 상훈이 일찌감치 마음을 잡고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학문의 유입은 급격히 이루어졌고, 대부분 한다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앞다투어 타지로 유학을 떠나 신학문을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상훈도 신학문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유학자보다 완고하고 엄했다. 신학문은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였고, 특히 귀한 아들이 자신의 그늘을 떠나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불행한 결혼, 세상에 눈뜨게 하다

열다섯의 상훈은 얼떨결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가 수차례 강조했던 집안 종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러기 위해 양자로 들어왔던 것이고, 그래야 궁핍한 작은집(사실은 친가)이 그나마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가야산 너머 경북 성주군 해평리의 여(呂)씨집 규수였다. 신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멋모르고 든 장가이고 보니 스스로 마음을 열기도 어려웠고, 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결혼 생활은 겨우 1년 만에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졌던 아내가 해산을 하던 중, 산역을 이기지 못하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소년신랑 김상훈으로선 처음 알게 된 인생무상이었다”(<변신의 일생과 갈등의 시>, 정영진, 1989년 <문학사상> 198호). 아무리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시켜서 한 결혼이지만, 그래도 1년여 간 살을 맞대고 살았기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없을 수 없다.

이렇게 짧은 결혼 생활은 불행으로 마감되고 말았으나, 이 결혼으로 상훈 자신은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었다. 결혼 자체가 가져다준 변화가 아니라, 처가에서 본 또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그에게 변화를 일깨운 것이었다.

상훈이 처가에 들렀을 때, 그와 비슷한 또래의 처남들이 그저 시골에 파묻혀 한학만이 전부인 양 몸을 까딱이고 맹자 왈 공자 왈 웅얼거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울의 중학교에 유학해, 까만 교복과 교모를 쓰고 신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보면서 상훈 자신이 얼마나 부러워했던 모습인가.

“나는 누구이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상훈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내로라하는 부잣집 아들에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고 싶었던 신학문은 하지 못하고 시골에 틀어박혀 곰팡내 나는 한문 서적이나 들추고 있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상훈은 집에 돌아와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이 그대로 시골 구석에 들어앉아 가산을 물려받아 별다른 걱정 근심 없이 대를 이어며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인가. 결국 상훈은 아버지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버님,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중학교에 진학 할랍니더. 댕기게 해주이소.”

며칠을 벼른 상훈은 어느날 아버지와 마주앉아 조심스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거는 벌써 끝난 얘기 아니가. 씨잘대기 없는 소리 허지 말고 하던 공부나 잘 하거래이.”

하지만 아버지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미리 예상했던 바대로 아버지도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남들이 신학문 신학문 허니까네 머이 새롭고 더 좋아보일란가 몰라도 그기 다 부질없는 짓인기라. 무엇보담도 집에 있시모 묵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머 하나 부족헌 거 없이 펜안히 살 수 있을 거로 머하로 객지로 떠돌아 댕김서 배곯고 생고생을 사서 한단 말이고. 더 이상 괜한 소리 말거래이.”

상급학교 진학 요구 단식농성

하지만 상훈의 생각도 단호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다른 친구들 대부분이 진학을 한다고 하니 자신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가에서 처남들과 만난 후 상훈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던 것이다.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의 길만 고집하는 상훈과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는 상훈이 마음속 이쪽과 저쪽에 자리 잡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한쪽이 “이건 내 인생이고 이미 난 내 인생의 항로를 결정했어.” 외치면, 다른 쪽 상훈이 “아버지도 네 입장이나 네 미래를 충분히 고려해서 저러시는 것 아니겠어?” 했다.

또 “세상이 바뀌었으면 바뀐 세상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야?” 하면, 다른 상훈이 “동학혁명이나 개화기, 경술국치까지……, 세상 변하는 거야 아버지가 더 많이 봐왔고 그런 변화에 잘 적응했으니까 아직까지 허투루 재산 빼앗기지 않고 잘 버팅겨 온 것 아니겠어?” 맞받아쳤다.

그러다가 한 상훈이 “내가 친자가 아니라 양자니까 믿지 못해서 객지에 안 보낼라쿠는 거 아니겠어?” 하면, 다른 상훈이 또 “아버지도 양자였는데 설마 그렇게야 생각하겠어? 그저 하나뿐인 아들 고생할까봐 사랑하는 맘에 고집을 부리시는 게지.” 하고 받아 넘겼다.

하여간 그런 중에도 상훈은 점점 더 자신의 의지가 확고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정 그렇게 중학교 가는 걸 반대하시믄 저도 인자 자식 노릇 그만 둘랍니더.”

상훈은 급기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겠노라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중학교 진학을 허락받을 때까지 단식농성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처럼 거센 아들의 저항에 놀라 아버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했다.

김상훈 시 연구 상세보기
한정호 지음 | 세종출판사 펴냄
입북시인 김상훈의 삶과 문학에 관한 연구서. 광복기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 김상훈 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도하고 있는 학위논문들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