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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권환 시인(4)‘운동으로서의 문학’의 전형

‘무작법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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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 권환 시의 변모 단계를 구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더군.
을 : 권은경은 (1) 카프의 볼셰비키 대중화와 연결된 초기 선전 선동의 급격한 서술시 (2) 카프 해체 뒤 광복까지에 이르는 내면적 윤리탐구의 감각시 (3) 광복 뒤 좌우 문단 대립과정에서 보여준 급진적 관념시 등(<권환 시 연구>, 경남대 석사논문, 1990)으로 나눴어. 반면 김재홍은 (1) 아지프로 시 (2) 볼셰비키 투쟁노선 또는 무기의 시 (3) 전향과 순수 서정지향성 등(<볼셰비키 프로시인, 권환>, ≪카프시인비평≫, 서울대출판부, 1990)으로 나눴지. 김호정은 (1) 예술운동 볼셰비키화기의 시 (2) 내적 진실과 외적 현실 부조화시대의 시 (3) 해방공간의 시-진보적 세계로의 복귀와 좌절 등(<권환 시의 변모양상 연구>, 부산대 석사논문, 1993)으로 권은경과 비슷하게 보았어. 곽은희도 (1) 부조리한 현실의 고발 (2) 일상 세계의 발견과 서정성의 강화 (3) 해방과 민족적 삶의 복원 등(<권환 시 연구>, 영남대 석사논문, 1997)으로 비슷하고, 아예 김종호는 초기, 중기, 후기(<권환 시의 변모 과정 연구>, ≪상지논총1≫, 1995)로 나누었고, 목진숙은 카프 시기, 일제 말기, 해방공간(<권환 연구>, 창원대 석사논문, 1993)으로 나눠 살피기도 했어.

갑 : 비슷비슷하군.
을 : 응, 초기에 해당하는 카프 시절은 그가 볼셰비키 문학론을 강조하던 때였고 그것이 작품이 그대로 반영된 시기이기도 했어. 이 시기 발간된 ≪카프시인집≫(집단사, 1931)에 실린 권환의 작품은 초기 대표작에 속하지. 1931년 카프문학부에서 편찬한 이 시선집에는 김창술, 권환, 임화, 박세영, 안막 등 다섯 사람이 참여했는데 권환이 가장 많은 7편의 시를 수록했어. 한두 편 맛을 한 번 볼까?

機械가 쉰다
怪物가튼 機械가 숨죽은 것 가치 쉰다
우리 손이 팔줌을 끼니
돌아가는 數千機械도 命令대로 一齊히 쉰다
偉大도 하다 우리의 XX(단결:인용자)력!
……중략……
너들의 호위XX(경찰:인용자)이 긴 X(칼:인용자)을 머리우에 휘둘은다고
겁내서 그만 둘진대야
너들의 <사랑妾> 개X주의가 타협의 단(甘)사탕을 입에 너준다고
꼬여서 그만 말진대야
우리는 애초에 XXXX(파업투쟁:인용자) 시작 안햇슬게다
-시 <停止한 機械> 중에서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시 아닌가? 계급의식이 돋보이고 노동자의 단결력을 직설적 표현법으로 아지프로 해내고 있는 그의 대표시 중 한 편이지.

X(놈:인용자)들하고 X(죽:인용자)도록 X(싸:인용자)우다가
XXX(순사놈:인용자)에 ……(잡혀:인용자)서 XX(끌려:인용자)간 것을
우리는 잘 보앗다 우리는 잘 안다
동무들아 나어린 少年工 동무들아.
XX(가슴:인용자) 아프다고 울기만 하지 말고
X(분:인용자)하다고 XX(슬퍼:인용자)만 하지 말고
우리도 얼는 힘차게 억세게 잘어나서
용감한 그 아저씨들과 가치
수백만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
마른 X(피:인용자)를 X(죽:인용자)음X(뿐:인용자) ……(우리:인용자)들을 위해서
XX(싸우:인용자)자 응 X(싸:인용자)우자!
-시 <少年工의 노래> 중에서

일제의 수탈 속에 가난한 소년들이 힘든 노동판에서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시지. 저 수많은 XX, 복자가 당시 숨막힐 듯 펼쳐졌을 일제와 시인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상징하는 것 같지 않은가?

갑 : 음, 물론 짐작이 되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칼을 찬 순사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도망가고픈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터인데, 그런 대담한 시를 쓴 시인이야 오죽했겠나. 하지만 나로서는 솔직히 이런 대립적이고 도식적인 표현법은 읽기에 부담스럽고 저항감이 드네. “그래서 시의 육체성을 부정하고 앙상한 관념만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이른바 ‘뼈다귀시’라는 비판도 등장”(목진숙, 앞의 논문)했던 것 아니겠나.
을 : 자네는 권환의 초기 시보다는 중기의 내면적이고 서정지향적인 시가 더 마음에 들겠지?

갑 : 요즘 아이들 하는 말대로, 당근이지.
을 : 그래, 1935년 카프의 해산과 함께 이루어진 2차 검거로 구속된 권환은 수개월 후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났지. 하지만 그즈음 권환의 옥바라지로 인해 집안은 경제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권환 자신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었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것인지, 그의 작품에서도 서정적인 내면탐구에 치우치게 되었지. 그걸 두고 사람들은 현실토피적인 태도라고 비판을 가했고.

갑 : 어쨌든 그 무렵의 경향은 시집 ≪자화상≫(조선출판사, 1943)과 ≪윤리≫(성문당서점, 1944)에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더군. 시 <윤리>는 이렇게 시작하지?

박꽃같이 아름답게 살련다
흰 눈(雪)같이 깨끗하게 살련다
가을 湖水같이 맑게 살련다

손톱 발톱밑에 검은 때 하나없이
갓 탕건에 먼지 훨훨 털어버리고
축대 뜰에 티끌 살살 쓸어버리고
살련다 박꽃같이 가을 湖水같이
-시 <倫理> 중에서

언젠가 고은 시인이 이 시를 두고 “수많은 선동시와 투쟁시를 지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소박한 염원을 노래한다. 노래가 아니라 독백”이라고 한 적이 있지. 나는 그보다는 <寒驛>이 훨씬 마음에 들어.

바다같은 속으로
박쥐처럼 살어지다

汽車는 鄕愁를 싣고
납(鉛)같은 눈이 소리없이
외로운 驛을 덮다

무덤같이 고요한 待合室
벤치우에 혼자 앉어
조을고 있는 늙은 할머니

웨그리도 내어머니와 같은지?
귤껍질같은 두볼이

젊은 驛夫의 外套자락에서
툭툭 떠러지는 힌눈

한숭이 두숭이 식은 煖爐우에
그림을 그리고 살어진다
-시 <寒驛> 전문

섬세한 이미지의 조형능력과 직관이 뛰어난 작품 아닌가. 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김광균의 <외인촌>이나 <와사등>의 분위기가 느껴져.
을 : 그래, 자네 같은 사람들이 초기 시보다는 그런 시들을 선호하고 일부러라도 더 부각시키고 싶은 마음은 나도 이해하네. 하지만 해방 후 발행된 시집 ≪凍結≫(건설출판사, 1946)의 서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네. 서문에서 권환은 “나의 詩作에 있어 解放以前의 本格的 活動時代는 1932∼3年 前後의 프로藝術運動 全盛時代였다. 그러나 그때 新聞雜誌에 發表된 나의 詩稿는 그 후 去益 尤甚했던 日帝의 彈壓으로 一篇도 詩集에 發表되지 못하고 또 大部分 保存되지도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가장 痛憤히 여기는 바이다. 나는 今後 可能한 限 泯沒된 그것들을 찾아내어 自由로운 이 世上에 내놓으려 한다.”고 술회했네. 다시 말해 권환은 자기 시의 본디 근본을 카프 활동기로 생각했다는 것이지.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개인시집에 별다른 제재 없이 묶을 수 있었던 시들보다 그럴 수 없었던 시들에 대한 애착으로 드러난 것 아니겠나.

갑 : 하지만 평자들의 평가는 냉정하더군. “그의 광복 이후 시는 문학적 형상화와 현실의 구조적 모순인식이라는 점에서 당대 젊은 김상훈의 시보다 훨씬 밀도가 떨어지고, 계급적 당파성과 운동 추진력 쪽에서도 당대 유진오나 (정지용에게 사사받고 1948년에 시집 〈옥문이 열리던 날〉을 펴냈던:인용자)상민의 시보다 훨씬 강도가 떨어”(권은경, 앞의 논문)진다더군. 김윤식은 “카프문학이란 질적 전환에로 이르기 직전까지의 문학, 곧 무작법(無作法)의 문학”이라고 규정했네. 그런데 그의 지적에 따르면 “임화가 마침내 자기의 자질에 알맞은 시의 형식을 단편서사시에서 발견해냄으로써……무작법의 시학에서 벗어나 카프시의 범주에서 조선시문학사에로 편입될 수 있었”던 반면, “권환의 문학은 끝내 무작법의 시학에서 머물렀다”는 것이었네. 참,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많은 평자의 평가가 그러하니 그런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을 : 물론이지. 하지만 이것만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난 생각하네. 뭐냐면 조선시문학사로 편입되지 못한 권환의 문학이 아니라, 다시 말해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나 ‘텍스트로서의 문학’이 아닌 ‘운동으로서의 문학’ 범주로 권환 문학을 볼 수도 있다는 말일세. 김윤식도 그랬지. “권환만이 ‘운동으로서의 문학’ 범주를 시장르에서 계속 유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그러면서 “그 자체로 성립되는 한 전형이어서 문학미달도 문학초월도 아닌 영역”이고, 이 때문에 “무작법의 시학으로서의 권환 문학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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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 지음 | 전망 펴냄
31년 카프 제2차 방향전환 중심인물이었으며 54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시인 권환(본명 권경완)의 문학 전반을 조감할 수 있는 전집. 발표순으로 정리한 시와 소설, 희곡, 평론과 산문을 통해 88년 해금 이후 여전히 우리 시야 밖에 머물던 시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