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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설

논개(연재4)어린애, 노인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판인데 배신을...?

아무 연고도 없는 계집아이가, 더군다나 양반가의 처자도 아닌 사노비 신분으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어요. 이제 열다섯밖에 되지 않았지만 터질 듯한 가슴께가 오늘따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4.

 



“마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요.”

땅거미가 지자 슬그머니 나가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 어린년이가 제 귀에 속삭이더군요. 오후 내내 국향이 보낸 무기 죽엽(竹葉)과 온종일 춤사위 연습을 하느라 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참이었지요.

“무, 무슨 일이냐?”

눈만 감으면 몽달귀신, 달걀귀신, 물귀신, 미명귀(남의 아내로 젊어서 죽은 귀신), 무자귀, 손각시(처녀가 죽어서 된 귀신), 새터니(굶주림과 아픔에 시달리다 죽은 계집아이의 넋) 등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달라붙어 괴롭혔답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지거나 혹은 저고리 고름을, 혹은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면서 어디론가 끌고 가려했지요. 저는 할 일이 남았다며 발버둥치고요. 그때도 귀신들에게 시달리다 눈을 뜬 것이었어요.

“뭐가 이상하다는 게냐?”

어린년이는 아무도 없는데도 목소리를 낮췄지요.

“할멈이 안 보입니다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할멈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뭐, 근처에 마실이라도 간 게지. 이상할 것까지야 뭐 있느냐?”

“아닙니다요. 온통 빈 집들 뿐인데 마실을 가다니요. 게다가 왜놈들이 득실거리고 어린애, 노인 가리지 않고 겁탈하고 베는 판인데…….”

“그도 그렇구나. 아들 생사를 확인하러 간 건 아닐까? 죽었다면 시신 수습이라도 하려고…….”

어린년이는 제게 더 바짝 다가앉으며 속삭이더군요.

“저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요. 헌데, 엊그제 늙은 보부상이 했던 말이 아무래도 걸렸습니다요.”

“무슨 말?”

“왜놈들이 숨어있는 장수나 군사를 색출해내기 위해 방을 붙였다지 않았습니까요. 누구든 숨어있는 조선 장수와 군사를 고발하면 고발자의 가족을 보호해주고 상금까지 준다고 했다지 않습니까요.”

어린년이의 말은, 할멈이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었다면 최소한 시신만이라도 수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주막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밀고할지 모른다고 했지요. 어쩌면 전승연에서 제가 하려는 일뿐만 아니라, 행수기생과 늙은 보부상까지 나서 돕는다는 것을 일러바칠지 모른다고 걱정하더군요.

“그러니 마님, 여기서 가만있을 게 아니라 어디든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저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며 수수밥에 희여멀건한 풀죽일망정 나눠먹던 할멈이 설마 그러랴 싶기도 하고,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장수의 첩실 아니라 조선의 임금인들 대수랴 싶기도 했답니다. 저 하나의 안위뿐만이 아니라 몇 사람의 목숨이 함께 걸려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하다못해 근처 빈 집으로라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요.”

생각하고 있던 일을 입 밖에 내면 점차 확신이 들기 마련이지요. 제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린년이는 조바심을 내었습니다.

“아니다, 나는 할멈을 믿는다.”

딱히 확신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린년이는 더 권하려고 하지도 않고 입을 다물었어요. 제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지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울바자 밖에서 망을 보고 있겠습니다요. 제가 피하라고 소리치면 얼른 뒤꼍으로 해서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요.”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어린년이는 부득부득 밖으로 나가더군요. 참으로 질긴 고집불통이지만, 마음이 정말 예쁜 아입니다.

하지만 할멈은 조금 뒤에 혼자 시적시적 들어와 늦은 저녁을 차렸습니다. 어쩐지 다르지 않나 하고 눈여겨보면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그냥 봐서는 알아채기 어려운 변화였지요. 가령 왠지 모르게 허둥댄다는 느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 같은 것 따위였어요. 어린년이가 할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왔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별 수확은 없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분명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저 할멈한테 당하기 전에 빨리 피해야 한다니까요, 마님.”

이튿날 아침 일찍 주막을 나서는 할멈의 뒤를 흘겨보던 어린년이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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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숙 지음 | 청아출판사 펴냄
기생 논개의 삶을 형상화한 중견작가의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