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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설

논개(연재5)양손에 가락지 끼면 힘센 왜장이라도 꿈쩍 못해

5.

 


그런데 또다른 더 큰 문제가 생겨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에야 나타난 죽엽이 첫날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전승연이 내일 밤이라 마음이 바쁜데 좀 더 일찍 오지 않구선. 자, 얼른 시작하세나.”

그런데 이런 내 말에 죽엽은 대꾸 없이 들릴 듯 말 듯 콧방귀를 뀌며 눈을 흘기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요. 고혹적인 웃음을 머금고 술취한 사내들의 품에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춤사위를 선보이며 한 동작 한 동작 가르치던 전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지요.

“자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하지만 죽엽은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입을 삐쭉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죽엽이 무얼 잘못 알고 있는지 아니면 행수기생과 약속한 일까지 틀어진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답니다. 그래서 죽엽을 자리에 앉히고 정색을 하며 물었지요.

“자네가 종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일세. 어려워 말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든 해보게.”

그러자 죽엽은 여전히 입을 삐쭉이며 이곳 사투리로 투정부리듯 말하더군요.

“겔국, 마님이 살아남을라꼬 이러시는 것 아인교? 내가 해어화로 왜놈들 앞에서 춤추는 것만 해도 복장 터져 죽겄끄마는, 마님이 살아남을라꼬 허는 짓꺼리꺼지 도와야 하겠능교? 성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미친지랄 허지 말고 가지 말라쿠는 거를, 에나 어제 국향 성님허고 약조한 것만 없었시모 안 왔십니더. 그나저나 국향 성님은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킸는지 알다가도 모르겄네.”

죽엽의 이야기를 듣고 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국향이 자세한 것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마님도 생각을 함 해보이소. 양갓집 규수나 마나님들은 왜놈들에게 몸을 더럽힐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판입니더. 근데 마님은 지금 경각에 달린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아이고 제 발로 그 놈들한테 내 잡아 잡수 허고 들어가는 거 아이라예?”

저는 죽엽의 손을 잡았습니다. 제 계획을 세세히는 모르더라도 죽엽을 비롯한 기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마당에 오해는 자칫 패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자네는 행수기생을 믿지 못하는가?”

“예? 그건, 아이지예.”

“국향이 목숨 구걸하는 날 도와주라고 하던가?”

“그건 아이었지마는…….”

“자네는 국향을 믿는다 하지 않았는가. 지금 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국향을 믿듯 나를 믿고 전승연 때까지만 도와주시게.”

“그렇지만…….”

죽엽의 말로는 이번 일로 기생들 사이에 반발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젊은 기생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더군요. 그들이 보기에 저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철면피요, 파륜의 전형으로 비쳤겠지요. 그런데도 국향이 자세한 내막을 얘기하지 않고 죽엽을 제게 보내자, 나이든 축들이 나서 숙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무신 내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집단으로 반발하모 아무리 행수기생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기라예. 대다수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우짜겠십니꺼.”

죽엽의 말대로 국향이 제 계획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진다면 그만큼 비밀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위험도도 더 커질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오후에 들른 늙은 보부상도 비슷한 상황을 전했답니다.

“일이 자꾸만 애럽게 돼가고 있다 아잉교. 마님이 혼자만 왜장헌티 들러붙어 살 길을 도모한다고 생각허는 축들은 그런 일에 기생들이 나서 도울 필요가 없다꼬 난립니다요. 살 길을 도모하는 기 아니라먼, 최경회 장군님을 따라 마님이 스스로 남강에 몸을 던져야 한다쿠고요. 행수기생도 다른 기생들 말을 통 무시할 수만도 엄꼬, 설혹 마님 계획대로 하더라케도 그 일 담에 모든 기생들이 겪게 될 고초 때미네 고민하는 것 같았십니다요.”

그로서도 계획을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대로 두어도 일이 잘못될 것만 같아 어지간히 마음을 졸인 것 같았습니다.

어린년이는 여전히 할멈 때문에 하루 종일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요. 왜놈들에게 밀고하기 전에 손발을 묶고 재갈까지 물려 광에 가둘 궁리까지 했답니다. 이래저래 뒤숭숭한 데다가 춤사위가 제대로 몸에 익지 않아 초조한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앞뒤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지자 밖에서 망을 보던 어린년이와 보부상이 소리 없이 들어오더군요. 둘은 밖에서 말을 맞춘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어요.

“마님, 이거 이대로 했다가는 큰일 나겄습니다요. 내일 거사는 도저히 불가능항께 맴을 돌리시소.”

“맞습니다요, 마님. 나중에 다른 날을 잡거나 다른 계획을 세우더라도 지금은 안 됩니다요. 애먼 목숨만 값없이 버리는 것입니다요. 절대, 절대로 내일 일은 안 됩니다요.”

어둠 속에서 어린년이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하게 들렸습니다.

“할멈이 아직도 안 들어오는 것 보면 모르시겠습니까요? 분명 사단이 난 것입니다요. 당장 이 밤을 도와 몸을 숨기셔야 합다니까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답니다. 말이 쉬워 다른 날로 미루거나 다른 계획을 세우라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오겠습니까. 물론 두 사람의 안타까움과 불안을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고, 그들을 실망시킬 것을 생각하면 입만 자꾸 타들어갔지요.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한 식경이나 했을까, 살며시 사립짝을 여는 소리가 났어요. 우리 세 사람은 바짝 긴장해 어둠 속에 엎드려 숨을 죽였지요.

“마님, 접니다요. 늦었습니다요.”

할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습니다. 할멈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보부상은 나이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밖을 살피더군요. 그리고 아무도 뒤따르지 않은 것을 확인했는지 방문을 막고 섰습니다. 마치 할멈이 도망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할멈, 어딜 갔다 이제 오시우?”

묻는 어린년이의 목소리가 확연히 추궁하는 투였지요.

“할멈, 설마…… 왜놈들한테 갔다온 건 아니제? 니 아무래도 어지 오늘 영 허는 기 이상타. 하루 죙일 머 했는지 말을 함 해봐라.” 

보부상도 다그치는 말투로 여차직하면 덤벼들 태세였어요. 할멈은 두 사람의 말에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부시럭거리며 쌈지를 뒤적였지요.

“마님, 손을 줘보십시오.”

미처 손을 내밀기도 전에 할멈이 제 손을 더듬어 잡았습니다. 할멈이 잡은 손을 놓았을 때 제 손 안에 작고 동그란 것이 예닐곱 개 쥐어져 있더군요.

“이게…… 뭔가?”

대답에 앞서 먼저 한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락집니다…….” 

“가락지? ……이건 왜?”

그리고 떨리듯, 혹은 울먹이듯 할멈이 말하였답니다.

“마님이 왜장의 힘이 세어 뜻을 이루지 못할까 고심하는 걸 보고 준비한 것입니다요. 그냥 붙잡으려 하면 손이 풀리기 쉬우니까, 가락지를 끼면 낫겠다 싶었지요. 양손에 가락지를 하고 깎지를 끼면 천하에 왜놈 우두머리라도 꼼짝 못할 것입니다요.”

왈칵 울음이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습니다.

“그래, 이 가락지를 구하려고 어제 오늘 일찍부터 나갔던 것인가?”

“예에, 생각은 그리 했으나 제가 아는 사램들이 전부 가난한지라 구하기가 어려웠지요. 양손에 끼게 열 개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여덟 개밖에 못 구했습니다. 옥가락지가 하나, 금가락지가 둘, 나머지는 전부 은가락집니다. 그래도 뭐 아쉬우나따나…….”

저는 할멈을 와락 안았습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이렇게 힘들게 준비해 주어서 고맙고, 그런 줄도 모르고 의심했던 것이 못내 미안해서였답니다. 어린년이도 줌앞줌뒤(쏜 화살이 빗나간 것처럼 예측에 어긋나 맞지 아니함)한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보부상도 연신 헛기침만 해대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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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지음 | 자유문학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