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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마.”

'공것 바라기는 무당 서방'

예나 지금이나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싸게(공짜면 더 좋고) 부려먹으려 들고, 없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한다.
그래도 칼자루를 쥔 쪽은 있는 쪽이라, ‘공것 바라기는 무당 서방’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무당은 굿만 하면 돈이나 음식을 잔뜩 얻어오기 때문에 무당 남편은 공것을 많이 바란다는 얘기다.

요즘 자본가나 경영자들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심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옛이야기에는 그런 악덕 지주나 부자, 혹은 양반을 나무라고 심판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공짜라면 양잿물인들 못 마실까

공것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정도가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쳐 양잿물 아니라 사약이라도 몇 사발 들이킬 부자가 살았다.
고을 전체가 가난해 대부분이 삼순구식(三旬九食) 하는 중에도 베풀기는커녕 쥐어짜고 공으로 집어삼키려 드는 위인이었다.

이웃 동네에 마침 분별력 있고 의기충천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거친 땅을 일구어 열심히 일한 덕에 고만고만하게 먹고 살만은 하였는데, 이웃 부자의 행악이 해도 너무하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 어느날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 글쎄. 그 부자가 일곱 살배기 아이를 강제로 데려다 머슴으로 부려먹는다지 뭔가.”
동네 노인네들이 정자나무 아래에서 하는 말을 지나다 들었던 것이다.
연유를 물으니,
“지난 봄에 보리쌀 한 말을 꿔주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아이 아버지가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그만 실족해 죽고 말았다지 뭔가. 그러니 그 보리쌀을 어떻게 갚겠나? 그걸 핑계로 채 여물지도 않은 아이를 끌고가 머슴살이 시킨다니, 그게 원 사람이 할 짓인가?”

총각이 가만히 듣고 보니 기가 막히고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일곱 살이면 이제 겨우 부모 품에서 응석이나 부릴 나이인데, 그런 애를 머슴으로 부려먹겠다고 끌고 갔으니 참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총각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람에게 항의해 보았자 씨도 안 먹힐 게 분명했고 고을 원에게 고해도 가재는 게 편일 것 같았다.
하루 밤낮을 궁리한 끝에 꾀를 쓰는 게 상책이겠다 결론을 내리고, 바로 부자네 집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나를 찾나?”
부자는 미심쩍은 눈으로 총각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저는 얼마 전에 부모를 여의었는데 일가친척도 없고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그곳이 싫기도 해 떠나버렸지요. 마침 이 고을을 지나다보니 살기도 좋고 인심도 좋은 것 같아 눌러 살까 합니다. 보아하니 일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 머슴으로 안 쓰시렵니까?”
주인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비록 행색은 초라하나 기골이 장대하여 힘깨나 쓸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달려 이 핑계 저 핑계 대어 일곱 살배기 아이까지 논밭으로 내몰던 참이었는데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새경은 많이 못 주네."

그러나 문제는 새경이었다.(새경은 요즘 말로 하면 한 해 연봉 같은 것이다.)
총각 정도의 덩치 같으면 새경을 아주 많이 요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부자는 망설였다.
자칫 새경만 많이 받고 덩치값을 못하게 되면 본전도 못 찾는 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부자는 짐짓 무관심한 척 해보았다.
“뭐 일손이야 달리지는 않아. 오히려 남아돌 정도야.”
“그러지 마시고 한 번 일을 시켜봐 주십시오.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총각이 덤벼드는 걸 본 주인은 옳다구나 싶어 슬쩍 눙쳐보았다.

“일손이야 넉넉하지만 굳이 일을 하고 싶다면 받아 주지. 그런데 우리 집 살림이 겉보기와 달라서 새경은 많이 주지는 못하네.”
총각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놈한테 새경은 무슨 새경입니까? 그저 먹여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기만 하면 되지요.”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말하니 주인은 그만 입이 쩍 벌어졌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요, 벼르고 벼르던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었다.
새경 한 푼 주지 않고, 그저 밥이나 먹이고 행랑채 문간방이나 내어 주어 자게 하고 일할 옷만 주면 될 터였다.
그런 조건이면 장가가서 평생을 있겠다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박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주인은 선심 쓰듯 말했다.
“에헴, 그 뭐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터이니 오늘은 푹 쉬게나. 내 당장 상을 내오도록 할 것이니 배불리 먹고 한잠 푹 자두게.”
서둘러 상을 내오게 하려는데 총각이 조용히 주인을 불렀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주인마님. 듣자하니 이 집에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가 머슴 살고 있다던데…….”
“으응, 있지. 그런데 그게 왜?”
주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제가 이 집 머슴을 살고 싶다고 하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면서 저를 비웃지 뭡니까.”
“아니, 어떤 종자가 그런 소릴 했단 말인가? 엉, 내 당장에…….”
“참으시고 제 얘기를 좀더 들어보십시오. 저도 체면이 있는 놈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이 일하는 것도 비위에 맞지 않고 조무래기와 비교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제대로 된 일꾼 하나 놓치게 생겼으니 주인은 안달이 났다.

“비교를 하다니, 당치 않은 말일세.”
“아니요,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인어른께서야 비교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을 사람들이나 관가에서는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그 놈을 내보내고 나면 일을 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딴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주인은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그러자 총각은 약속한 모든 것을 문서로 써서 나눠 갖자고 말했다.

“전에 제 동무 하나가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주인이 말로 약속한 것을 어기고 제대로 먹여주지를 않은 적이 있었지요. 주인어른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만사가 분명하고 정확한 게 피차 좋지 않겠습니까요.”
뒤탈이나 뒷말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요, 주인한테 불리한 조건도 없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일을 해도 꼼꼼하고 확실하게 할 것 같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주인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문서 두 장을 썼다.

“나 아무개는 언제부터 이 총각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기로 한다. 그 대신 이 총각은 우리 집 머슴으로 삼 년 동안 일한다. 총각이 일하기 전에 오늘 당장 일곱 살배기 아무개는 자기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 약속을 어긴 사람은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해서 도장까지 꾹꾹 눌러 찍은 문서를 각각 한 장씩 가졌다.
주인은 잘 하면 총각을 평생 머슴으로 눌러 앉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문서를 땅문서와 함께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물론 어린 머슴은 그 길로 제 어미에게 달려갔다.

첫 날 아침, 부자 vs 총각

드디어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주인은 새머슴이 일을 잘하는지 보려고 일찌감치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다른 머슴들은 벌써 일어나 마당을 쓸고, 소여물을 쑤어 먹이고, 쟁기며 가래를 쓸 수 있게 준비하고, 논에 나가 물길도 보고, 잡초도 뽑는 등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새머슴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제 온 새머슴은 어디 있는가?”
그러자 마름 정서방이 안절부절 못하며 행랑채를 가리켰다.
“글쎄, 이 녀석이 아무리 재촉을 해도 방에서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요.”
주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니나 다를까, 방 문을 열어보니 총각이 옷을 홀딱 벗고 큰댓자로 드러누워서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아, 이놈아. 일어났으면 마당도 쓸고 소죽도 끓여야지 뭘 하고 이렇게 자빠졌어?”
소리를 지르기는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커먼 물건을 드러내 놓고 벌거벗고 누워있었다.
“이런 우라질 놈, 여태 옷도 안 입고 드러누워서 어쩌자는 게야?”
그러자 총각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고 참, 영감마님도. 마님이야말로 여태 뭘 하다가 지금 와서 큰 소리를 치십니까?”

주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데 또,
“벗는 거야 제가 하는 게 맞지만, 입혀 주는 거야 약조를 하셨으니 당연히 영감마님이 해주셔야지요.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않습니까요.”
이런다.
“아니, 이놈아 그건 내가 옷을…….”

그러나 주인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이래서야 어찌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말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다. 분명히 문서에 주인마님 손으로 직접 쓰시고는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쏘아붙였다.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입혀 주지 않으시니 저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요?”

주인이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문서에 ‘입혀 준다’고 쓸 때에는 그저 헌 옷이나 두어 벌 주면 될 줄 알았지, 자기 손으로 옷을 입혀 줘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아무리 악을 써도 머슴이란 놈은 자꾸 문서를 들먹이며 부득부득 옷을 입혀 달라니 기가 막혔다.
한동안 옥신각신 하다가 어쩔 도리가 없어서 주인이 머슴 옷을 다 입혀 주었다.

그제야 총각이 일어나서 마당으로 나갔지만, 다른 머슴들이 죄다 아침 일을 마쳐버려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아침 밥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다른 머슴들과 함께 밥상을 받고 앉아 남 밥먹는 것만 멀뚱히 보고 있을 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주인마님! 주인마니임!”
안방에서 밥을 먹으려던 주인은 총각이 부르는 소리에 내다보았다.
“이 눔아, 얼른 밥이나 먹을 일이지 나를 왜 불러?”
주인이 짜증내며 통박을 주니까
“아이고 참, 어제 저하고 약속하신 것 있지 않습니까요. 문서에도 쓰셨고…….”
그러면서 떠먹여 달라는 듯 입만 딱 벌렸다.
“뭐라고, 이눔아?”
“아니, 먹여 주신다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처나 아이들, 머슴과 하녀 모두들 주인만큼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한동안 또 옥신각신 하다가 주인이 할 수 없이 머슴을 불러 올렸다.
자기가 머슴들 사이에 끼여 앉아 머슴에게 밥을 떠먹여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주인은 밥을 다 먹였다.
약속을 어겼을 때 총각이 어떤 요구를 해올지 몰랐고, 그런 상황을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렇게 밥을 다 먹이고 나서야 머슴이 슬금슬금 일하러 나갔다.
다른 사람이 먹여 주는 건 절대 입에도 대지 않고 주인이 먹여 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점심도 저녁밥도 먹여주고 나니까, 이번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행랑채에서 안채까지 들리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주인을 찾아댔다.
“이놈아, 잠 좀 자자. 잠 좀 자.”

“주인마님, 저부터 재워 주고…….”
주인이 이제는 ‘약속’이니 ‘문서’라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진땀이 났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기 자식에게도 하지 않았던 일을 저 커다란 덩치의 총각에게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머슴 사는 동안 내내 그 짓을 해야 할 판이니 할 짓이 아니었다.

"제발 우리 집에서 나가주라"

주인이 한참 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 너에게 쌀 한 가마 줄 터이니 그만 나가주거라.”
“아니, 영감마님. 이건 문서로 약속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요. 그만 재워 주십시오.”
주인은 좀더 생각하다가
“다섯 가마 주마.”
“재워 주셔야…….”
“좋다. 열 가마.”
“하루도 안 지나서 이러시면…….”
“저 건너 산 아래 밭뙈기를 주마. 더 이상은 안 돼!”

그제야 총각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천천히 제 짐을 꾸렸다.
“영감마님이 정 그러시겠다면 그리 하지요, 뭐.”
총각은 땅문서를 받고 머슴문서를 받아 한밤중에 그 집을 나왔다.

그 후 부자는 함부로 문서를 쓰지 않았지만 공것 좋아하는 버릇은 고치지 못하였다.
여전히 쥐어짜고 날 것으로 그저 먹으려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러고도 가세는 날로 기울어 나중에는 아들에게 물려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결국 사람을 쥐어짜서 얻은 재물이나 부는 오래 가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뿐인 것이다.
비정규직의 설움과 고통을 이대로 두고, 그들의 영화가 얼마나 갈지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