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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귀 얇은 사람이 돈 벌고 쓰는 방법


돈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

재물은 모으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
한 줌 가득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뻔히 알면서도, 보면서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돈은 모으기보다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은 착한 사람도 사악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이야기를 보면 재물을 모으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수없이 등장한다.
이번 이야기는 재물을 모으거나 지키는 것에 손방인 자식을 위해 기지를 발휘한 어느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귀가 얇은 아들 골칫거리

오랜 옛날, 남도의 어느 고을에 정영감이라는 천석꾼이 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오로지 열심히 일하고 아껴서 모은 재산이 꽤나 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식이 귀해 안절부절 못하던 차에 백일기도로 뒤늦게 얻은 아들이 대를 이을 것을 생각하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 가지 걱정이 있어 나이가 들수록 정영감의 수심은 깊어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아들이 장성해가면서 제 생각이라곤 없이 남의 말을 잘 듣고, 잘 도와주는 너무 착한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걱정거리가 되는가 생각하겠지만, 자신이 애써 모은 재산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일이었다.


결혼을 시키면 나아질까 해서 일찍 결혼을 시켰으나 마찬가지였다.
정영감과 달리 부족한 것 없이 자란데다, 천성이 귀가 얇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머니를 털리기 예사였다.

나날이 노쇠해지는 정영감은 대를 이을 아들이 시원찮아 근심만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다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대를 이을 아들인데 마음이 여리고 도대체 욕심이 없다오. 앞으로 이 집 살림을 제대로 이끌어갈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점쟁이는 혼자 웅얼웅얼 하더니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성품은 어질지만 재산을 지키지 못할 운세입니다. 아마도 영감님이 세상을 뜨고 나면 한두 해 안에 모든 재산을 잃고 말 것입니다.”

아들과 머슴

정영감은 예감했던 바지만 실망이 컸다.
열심히 모은 재산인데, 귀하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 재산을 모두 잃는다는 말에 병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때 마침 머슴 구천이가 땔감을 지게에 가득 지고 들어왔다.
그것을 본 점쟁이는 구천이를 보고 말했다.

“허어, 거참. 부귀영화를 누릴 상이로군.”
정영감도 전부터 구천이가 야무지고 됨됨이가 아주 진득해서 미더운 데가 있다고 생각해온 터라 점쟁이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정영감과 부인은 궁리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었고, 점쟁이도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며칠 후, 정영감은 머슴 구천이를 불러 앉혔다.
“네가 우리 집에 온 지도 벌써 서너 해가 족히 넘었구나. 그간 내 너를 찬찬히 보아오면서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만하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내가 너를 좀 도와주려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구천이는 귀가 솔깃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 너에게 돈을 빌려주겠네. 이렇게 너를 도우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네. 우리 아들이 세상물정 모르고 어수룩해서 내가 죽고 나면 재산을 몽땅 털려버릴 것 같아 하는 말이네. 그러니 자네가 잘 된다면 우리 아들이 고생할 때 지금 내가 주는 돈을 아들놈에게 돌려주게.”

뜻밖의 제안에 놀란 구천이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르신 도움으로 잘 살게 된다면 어찌 도련님을 돕지 않겠습니까? 걱정마십시오.”
구천이는 정영감의 부탁에 굳게 약속했다.
구천이로서는 평생 만져 보기도 힘든 돈이었다.
정영감은 구천이와의 약속을 적은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천냥이라는 큰 돈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정영감은 며느리를 불렀다.

“얘, 아가! 네가 시집올 때 해온 양단저고리를 가져오너라.”
며느리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시아버님의 분부에 따랐다.
다음 날 저고리를 되돌려주면서 정영감은 간곡히 말했다.

“시집올 때 가져온 옷은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살다 보면 혹 상황이 어려워 이 옷을 팔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 저고리 동정만은 꼭 간직하거라. 내 말을 명심해서 기억해 두어라.”

그 많던 재산은 점점 줄어들어...

그런 일이 있는 뒤 정영감은 세상을 떠났고 부인도 두 해 뒤 그 뒤를 따랐다.
당연히 많은 재산이 아들에게 물려졌다.
이 소문은 금방 퍼져 주위에는 돈을 얻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씨 착한 아들은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을 의심 한 번 안 하고 대했다.
어느덧 그 많던 재산이 물이 새듯 조금씩 줄어갔다.
결국 나중에는 땅 한 뙈기 없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돈 벌 궁리도 못하는 아들은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다 팔면서 생활을 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거라고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양단저고리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앓아 눕고 말았다.
“여보, 이제 이거라도 팔아야 약이라도 먹일 수 있지 않겠소?”
“하지만 이 저고리는 아버님이 죽을 때까지 간직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아들은 막무가내로 그 저고리마저 들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그럼 동정이나 뜯어내고 가세요. 아버님의 유언이에요.”
그 말에 아들은 저고리에서 동정을 떼어냈다.
그러자 동정 속에서 웬 종이쪽지 하나가 나왔다.
그것은 바로 정영감이 구천이에게 천 냥을 빌려주었다는 빚문서였다.

“아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우리는 이제 살았소. 천 냥이면 논밭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돈이 아니오?”

아들은 기뻤다.
그리고 부모님이 새삼스레 고맙게 여겨졌다.
그의 아내도 오랜만에 기쁜 표정으로 문서를 살펴보았다.

“여보, 등잔불을 이리 가까이 가져와 보오. 다시 한 번 자세히 봅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빚문서를 등잔불에 가까이 가져가자마자, 불꽃이 문서에 옮겨 붙더니 그만 타버리고 말았다.
급히 불을 흔들어 껐지만 남은 것은 귀퉁이 일부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재뿐이었다.
천 냥짜리 문서가 순식간에 재가 되고 만 것을 본 부부는 망연자실 그 자리에 굳어진 듯 말이 없었다.


딱 잡아떼는 전직 머슴 구천이

한참 뒤 아내가 말했다.

“너무 실망마세요. 구천이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이제는 부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그 돈을 돌려줄 거예요. 날이 밝으면 구천이를 찾아가 사정을 말해보세요.”
날이 밝자 아들은 구천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구천이는 시치미를 떼었다.
빚문서가 있었는데 타버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재산이 늘어난 것으로 보면 천 냥을 되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근거가 없다고 하니 순식간에 마음이 돌변하고 만 것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우. 내가 어르신 돈을 썼다고? 피땀 흘려 모은 새경으로 일군 재산이지, 그런 적 없소이다. 괜히 어렵다고 억지부리지 마시우.”
구천이의 매정한 말에 아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증거가 될 만한 빚문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두고 끙끙 앓던 아들은 생각 끝에 고을 원님을 찾아가 간언했다.
“제 아버님이 구천이에게 빌려준 돈 천 냥을 찾아주십시오.”
“어디 빚문서를 내놓아 보아라.”
“그건……. 실은 실수로 불에 태우고 말았습니다.”
“빚문서도 없이 무슨 빚을 받겠다는 거냐. 구천이가 돈을 빌리는 걸 본 사람이라도 있느냐? 증거가 없으면 네 말만 듣고는 어찌 할 수가 없구나. 돌아가거라.”
아들은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한 마음과 이제껏 바보스럽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울화가 치밀어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생각 끝에 아들은 다시 원님에게 가 타고 남은 문서를 보여주고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원님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기는 한 모양이로구나.” 하며, 일단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몰래 아들과 구천이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몇 푼 안 되는 새경으로 큰 부자가 됐다고?

이튿날, 원님은 두 사람을 모두 불러들였다.
“제 아버님께서 구천이에게 천 냥을 빌려 주었다는 문서를 찾았는데, 실수로 그만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틀림없는 빚문서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큰 돈을 빌린 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머슴인 저에게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원님은 아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놈!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부모의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도 남의 재산이 탐나서 거짓말을 꾸며낸 것이 틀림없으렷다. 여봐라, 당장 저 자를 옥에 가둬라!”
“억울합니다. 다시 한 번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아들은 포졸들에게 끌려가면서 발버둥을 쳤다.
그 때 관가 뜨락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문난 재판의 판결을 구경하려고 와 있었다.
구경꾼들 가운데에는 그 날 옥에서 풀려난 도둑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아들의 어수룩한 말과 행동이 우스워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님은 도둑들을 보고 호통을 쳤다.
“뭐가 좋아서 웃는 것이냐? 남이 옥에 끌려가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느냐? 헌데, 너희들은 오늘 풀려나온 도둑들이 아니더냐?”
“네! 그렇사옵니다만.”
도둑들은 목을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가만 있자, 구천이 너 이놈! 너야말로 저들과 한패가 아니냐? 한패이기에 저리들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원님! 저는 저들을 전혀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돈 한푼 없고 땅 한 뙈기 없던 놈이 어디서 돈이 나와 땅을 사고 돈을 모았단 말이냐? 몇 푼 안 되는 새경으로 그 많은 땅을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적 무리의 두목 노릇을 한 게 틀림없다. 여봐라, 구천이를 묶어라!”
원님의 호령이 떨어지자 포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구천이를 꽁꽁 묶었다.
천 냥을 떼어먹으려다 오히려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로 몰리게 생겼으니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닙니다요, 원님!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부자께서 빌려주신 돈 천 냥을 가지고 논밭을 산 것이옵니다. 제가 그만 돈에 눈이 멀어 거짓을 고하고 말았사옵니다.”
당황한 구천이가 소리쳤다.

재산을 찾기는 했지만...

구천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원님은 돈 천 냥과 그간의 이자까지 아들에게 되찾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부모님이 남긴 유산도 찾지 못할 뻔한 아들은 재산을 되찾게 되었다.

아들은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겪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런데 워낙에 유복하게 자라왔고 돈 벌 줄도 몰라 되찾은 돈도 이래저래 잃고 실패도 여러 번 했다.
그래도 구천이에게 당했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든지, 착실하게 일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만은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