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재물 복을 타고나 잘 살기 위해서는...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옛말에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고, 복 없는 장님은 점을 배워도 고뿔 앓는 놈도 안 온다고 했다.
또 있다. 얼레빗 참빗만 품고 가도 제 복이 있으면 잘 산다고도 했다. 결혼할 때 혼수를 못해 가도 제 복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산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 아무리 열쇠를 주렁주렁 매달고 명품에 외제로만 혼수 잔뜩 해들고 가도 제 복이 없는 사람은 참파토(斬破土)가 나고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 복’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타고난 운명이라면 제 복 없는 사람은 잘 살지도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옛이야기에 나타나는 제 복 타고난 사람들의 특징은, 운명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제 복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보자.

두 거지

아주 오랜 옛날, 제주도에 거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두 거지는 서로 공평하게 윗마을과 아랫마을에서 살며 다른 지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모진 흉년이 들어 거지는 물론이고 마을주민들도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었다.
“우리 먹을 것도 없다네. 야박하다 생각지 말고 다른 마을로 가 보게.”
가는 곳마다 이러니 거지는 헐수할수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마침 길을 가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두 거지가 중간에서 만나게 되었다.

“지금 윗마을이 흉년이라 얻어먹을 것이 없어서…….”
“이를 어쩌나, 아랫마을도 흉년이라 윗마을로 가보려던 참인데…….”
두 거지는 그만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아, 이러면 어떻겠소?”
두 거지는 생각 끝에 부부가 되어 서로 도우며 살기로 했다.

두 거지가 만나 결혼했으나

살림이라고 시작했으나 워낙 맨손이었기 때문에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거적때기 두어 장을 이어붙인 것이라 한데나 마찬가지였고, 남의 집 허드렛일 해주고 밥 얻어먹기는 거지 때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부인은 첫아이를 낳았는데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부부는 어려운 형편에 아이를 굶겨 죽이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살려고 하는 둘의 결심이 기특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이 때 한 이웃이 은쟁반에 음식을 담아온 것을 보고 아이 이름을 은장애기라고 지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또 딸을 낳았다. 이 때도 그 이웃 사람이 음식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번에는 놋그릇에 담아왔다. 그래서 둘째딸의 이름은 놋장애기가 되었다.
다시 한두 해가 지났을 때 세 번째 딸이 또 태어났는데, 그들 부부가 처음 겪는 극심한 가뭄으로 모두들 어려운 때였다. 이 때는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서 놋그릇까지 팔아야 했기 때문에, 그 이웃은 쇠죽 담는 검은 나무그릇에 거친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셋째 딸을 검은장애기라 불렀다.

복덩이 검은장애기

그런데 검은장애기가 태어난 후부터는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부부가 하는 일마다 잘 되었고 오랜만에 마을에도 풍년이 들었다. 부부는 이제 남의 집으로 음식을 얻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이들 부부에게 검은장애기는 복덩이였다. 조금씩 살림이 펴지면서 논밭을 장만하고 집도 샀다. 그래도 위세를 부리거나 있는 체하지 않고 여전히 열심히 일하였고, 오히려 거지 노릇할 때를 생각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웃에서는 점점 이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마침내 검은장애기 아버지를 ‘한림수좌’라고 높여 불렀다.

한림수좌는 더없이 행복했으며 세 딸을 사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검은장애기가 복을 가져온 것 같아서 더욱 귀여워했다. 어느 날 한림수좌는 세 딸들에게 차례로 물었다.
“은장애기야, 너는 누구 덕으로 사느냐?”
“물론 낳아주시고 키워주시는 아버지 어머니 덕이지요.”
한림수좌는 은장애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놋장애기에게 물어보았다.
“저도 늘 먹여주고 입혀주시는 부모님 덕으로 살지요.”
한림수좌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한림수좌는 마지막으로 막내인 검은장애기에게 물었다.
“첫째는 하늘님의 덕이고, 둘째는 땅님의 덕이고, 셋째는 부모님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이 집을 나가거라"

이 말을 듣는 순간, 한림수좌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토록 귀여워하던 막내딸의 말에 실망을 한 한림수좌는 소리쳤다.
“뭐라고? 하늘님과 땅님의 은덕이 먼저라고? 너를 이만큼 키워준 부모의 은공이 그것밖에 안 되더냐? 당장 이 집을 나가거라.”
서운하고 노여운 마음에 주워담을 새도 없이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막내만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시기해온 언니들은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검은장애기를 내쫓아버렸다. 검은장애기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집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림수좌는 이내 가엾은 생각이 들어 은장애기를 불러서 말했다.
“문 밖에 막내가 있거든 데리고 들어오너라.”
은장애기는 이 기회에 아주 막내를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어서 빨리 도망가! 지금 아버지가 나오시는데 너를 때려죽이겠대!”
말하고는 대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큰딸은 흉측한 지네로 변하고 말았다. 한림수좌가 아무리 기다려도 큰딸이 돌아오지 않자, 둘째딸을 다시 내보냈다.

둘째딸도 막내가 밉던 차에 보자마자 거짓말을 했다.
“너! 아직도 거기 있니? 도망가, 얼른. 아버지가 널 죽이겠야 말겠대!”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마자, 놋장애기도 그만 말똥버섯으로 변하고 말았다.
한림수좌는 심부름 보낸 두 딸아 돌아오지를 않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둘러 문을 나가다가 그만 이마를 문설주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순간 한림수좌는 눈이 멀고 말았다.
부엌에 있던 부인도 남편의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허둥지둥 부엌문을 나서다가 문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옆에 세워둔 절구공이에 눈을 부딪혀 부인도 그만 장님이 되었다.

부부는 다시 눈멀어 거지가 되고

한림수좌 부부는 그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쓰다 보니 금방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다시 거지가 되어버렸다.
한편 검은장애기는 집에서 쫓겨난 후 무작정 길을 떠났다. 아무리 걸어도 인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언덕 아래에서 마를 캐는 총각을 만났다.
“여보세요. 이 근처에는 사람이 사는 집이 없습니까?”
총각은 검은장애기를 한 번 훑어보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람 사는 곳은 없고 여우가 사는 곳은 알고 있지요.”

너무 무서워서 검은장애기는 더 물어 볼 엄두도 못내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또 한 총각이 마를 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근처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총각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없어요. 그러니 빨리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어느덧 주위는 어둑어둑해졌다. 더 무서워진 검은장애기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인가를 찾아 헤맸다. 그 때, 어둑어둑한 길섶에서 마를 캐는 총각 한 사람이 또 눈에 띄었다.

“여보세요. 이 근처에 사람 사는 집이 있는지요.”
그러자 그 총각은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언덕 아래에 가면 할머니가 사시는 초가집이 한 채 있습니다.”
검은장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급히 총각이 가르쳐준 대로 언덕을 내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희미한 불빛이 새오나오고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길에서 만났던 총각 삼형제

그러자 집안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누구시오? 이 어둔 밤중에.”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지내게 해 주세요.”
“그래, 사정이 딱하니 집은 좁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오.”
할머니의 친절에 안도의 숨을 쉰 검은장애기는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한참 후 밖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 큰아들이 마를 캐 가지고 돌아오는 소리라오.”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큰아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검은장애기가 산길에서 처음 만난 총각이었다. 총각은 검은장애기를 보자 투덜거렸다.
“먹을 것도 없고 집도 좁은데, 왜 손님까지 들였어요?”
“불편하더라도 하룻밤 재워서 보내야지. 다 큰 처자를 밖에서 자게 둘 순 없지 않겠니?”
할머니는 아들을 달랬다. 이 때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둘째 아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산길에서 두 번째로 만난 총각이었다. 둘째 역시 손님을 맞았다며 연신 투덜거렸다. 조금 있자니 셋째 아들이 돌아왔다.

“어서 오너라. 그래 마는 많이 캤느냐?”
“예,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캤어요.”
셋째 아들은 검은장애기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어머니, 저 아가씨를 조금 전에 만났는데, 사정이 딱한 것 같아 우리 집을 가르쳐 줬어요.”
그러자 두 형은 또 투덜거렸다.
“그래? 우리집 사정이 어떤지 빤히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다니, 바보 같은 놈. 막내 네가 저 손님 먹을 것까지 책임지거라!”

셋째아들과 결혼한 검은장애기

두 형은 캐 온 마를 쪄서 가운데 토막은 저희들이 먹고 꼬리는 할머니에게 주었다. 그러나 셋째아들은 형들과 달랐다.
“어머니, 가운데 토막은 어머니가 드세요.”
“아니다. 원, 하루 종일 고생한 너희들이 실하고 좋은 걸 먹어야지.”
검은장애기는 셋째 아들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사람과 결혼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음날 검은장애기가 그 집을 나서려 하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세 큰비가 쏟아졌다. 할머니와 셋째 아들이 말려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라 비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내렸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 머무는 동안, 셋째 아들도 마음씨 착한 검은장애기가 좋아졌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도 나이가 드셨으니 이제 며느리를 맞아 좀 편해지셔야지요. 저 처자가 며느리감으로 괜찮으시다면, 제가 청혼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것 좋은 생각이다. 며칠 있어 봤더니, 마음씨도 곱고 일하는 것도 아주 야무지더구나. 하지만 먼저 아가씨의 마음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니?”

다음 날, 셋째 아들이 머뭇거리며 검은장애기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검은장애기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결혼을 승낙했다.
검은장애기와 결혼한 셋째 아들은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마를 캐려고 땅을 파면 그 속에 황금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그 전에도 마를 캐었던 곳이지만 이런 일은 없었던 터였다. 덕택에 가난하던 집안은 금방 부자가 되었다.

거지들을 위한 잔치

이제 잘 살게 된 검은장애기는 문득문득 고향에 있는 부모 생각이 났다. 결국 남편에게 부탁해 수소문을 해본 결과, 부모님은 장님이 되어 거지로 살다가 어디론가 떠나고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검은장애기는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남편을 설득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자고 했다. 그러자 제주도에 사는 모든 거지들이 잔치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그런데 백일 동안 계속 잔치를 베풀어도 검은장애기의 부모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앞이 안 보여서 절벽이나 바닷물에 빠지신 것은 아닐까요?”
검은장애기는 걱정하며 남편에게 말하였다.
“걱정마시오. 당신 부모님은 살아 계실 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러다 잔치가 끝나는 날이 되었다. 해가 질 무렵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며 들어서는 늙은 부부가 보였다. 검은장애기는 늙고 초라한 차림새에 눈은 멀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노부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나 부모님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 생각에 늙은 거지 부부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말을 걸었다.
“많이 드십시오. 잠시 쉬면서 옛날 이야기나 해 주시지요.”
“옛날 이야기를 알아야 하지요. 살아온 날이 평탄치 못하여 재미난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고 하지도 못한다오.”
“그러면 두 분 살아온 이야기라도 들려주세요.”

“기구하고 어두운 우리 이야기, 이런 부잣집에 어울리지 않는데 들어서 무엇하시려우.”
“기구하고 어두운 이야기, 알고 보면 다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지요.”
그러자 늙은 거지 부부는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거짓없이 들려주었다. 듣고 있던 검은장애기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막내딸 검은장애기가 어디 가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긴 세월을 헤매고 다녔어도 도무지 만날 수가 없구려. 만나서 못난 애비의 잘못을 빌어야 하는데…….”

딸 만나고 눈 뜨고...

검은장애기는 그만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검은장애기, 여기 있어요. 눈을 뜨고 저를 보세요.”
“뭐라고? 검은장애기라고? 아니야, 믿을 수가 없어. 당신이 검은장애기라니…….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애가 탄 거지부부는 눈을 힘을 주고 부릅떴다. 순간 어둡고 침침하기만 했던 앞이 환히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눈 앞에서는 검은장애기와 사위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 네가 살아있다니…….”
“어머니, 아버지,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면 몰라보게 변하셨습니까?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부모를 만난 기쁨에 검은장애기는 또 다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검은장애기는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검은장애기를 이 세상의 재물과 사람의 운명을 맡아보는 신이 잠시 이승으로 놀러 왔던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 재물을 가져오는 신을 ‘삼공’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복을 타고나는 사람을 ‘삼공’신을 타고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이 옛이야기는 오랫동안 전승되면서 나중에 심청이 이야기로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