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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돈버는 데도 도덕적 기준과 관습이 있다

‘돼지 팔아 한 냥, 개 팔아 닷 돈이 양반’
신분사회에서는 타고난 신분을 어찌할 수 없었으므로 돈을 버는 방법으로 삶의 질을 높여나갔다.
그래서 ‘돼지 팔아 한 냥, 개 팔아 닷 돈이 양반’이라는 속담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양반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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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는 말을 즐겨 써왔는데, 열심히 돈을 벌면 정승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돈을 버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분명한 도덕적 기준이 관습적으로 존재해왔다.
그랬으면서도 개 같이 번다는 말을 써서 ‘악착 같이’라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그만큼 삶 자체가 고달프고 희망을 찾기 어려웠던 질곡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번 얘기의 형처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제 배만 불리려 한 형 거지

옛날에 거지 형제가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진 건 집도 절도, 밥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도 없었다.
거지 노릇을 하자 해서 한 것도 아니고, 살 길이 없으니까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손을 벌리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형은 욕심이 많고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서 동생 구박하고 쥐어패기를 밥먹듯 했다.
얼마나 성질이 고약했으면 빌어먹으면서도 동생이 더 많이 동냥을 해 오면 그것을 빼앗아 먹으면서도 심술을 부려댔다.
가지고 오면서 고기는 몽땅 먹어버렸지 이 자식, 쌀밥 대신 왜 보리밥을 더 많이 얻어왔느냐 이 자식, 반찬도 많이 얻어오지 왜 이것뿐이냐 이 자식, 온갖 트집을 잡아 매일매일 도붓장수 개 후리듯 해댔다.

한 번은 형이 아침에 나서면서,
“나는 기와집 많은 동네에 가볼 터이니, 너는 초가집 많은 동네에 가서 빌어 오너라.”
했다. 동생은 말해봐야 매만 더 벌 것이고 두 말 않고 하라는 대로 했다.

형은 쫄쫄 굶고 동생은...
그런데 그 날따라 기와집 많은 마을에는 호랑이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문을 꼭꼭 걸고 열어주지 않아서 형은 밥 한 술 구경도 못하였다.
초가집 많은 마을에는 결혼식이 있어 잔치하는 집과 제사가 든 집이 있어 아우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얻어왔다.

이번에도 형은 동생이 가져온 떡이며 전을 입안 가득 우겨 넣으면서도 잔뜩 심술이 난 형은,
“이런 우라질 놈, 내일은 내가 초가집 많은 마을에 갈 터이니, 너는 기와집 많은 마을에 가거라.”
되는 대로 내질렀다.
이번에도 동생은 토 달지 않고 형 말대로 했다.

그런데 초가집 많은 마을에는 잔치 끝에 친적집에 가고 집을 비워 놓거나 이미 거의 다 나눠 먹어버려서 형은 아무것도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기와집 많은 마을에서는 호랑이가 잡히지 않자 호랑이를 달래는 굿을 하는 바람에 아우는 또 실컷 얻어먹었다.
먹고도 남아서 한 바가지 담아 가지고 왔다.

"너 이 놈, 당장 꺼져버려라"
이렇게 되니 형은 하루 종일 쫄쫄 굶어 심통이 난 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너 이 놈의 자식, 내가 얻어먹을 것을 네 놈이 다 얻어먹는구나. 너 때문에 내가 살 수가 없어, 내 눈 앞에서 당장 꺼져버려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음식을 퍼먹던 젓가락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동생 눈이 찔려 피가 줄줄 흘렀는데,
“에이, 이 놈의 자식. 죽으려면 나가서 죽어라.”
댓바람에 내쫓아 버렸다. 결국 동생은 형에게 눈이 찔려 소경이 되어 쫓겨났다.

아우는 갈 곳도 없는 데다가 앞이 안 보이는지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산 속을 헤매고 다녔는데, 온통 넘어지고 긁혀 옷이 다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천방지방 헤매고 다니다가 마침내 어떤 집이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성큼 들어갔다.

“여보세요, 누구 안 계십니까?”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기다려도 사람이 오지 않아 빈 집이겠거니 생각하며 들어가게 됐다.
들어가서 피곤한 몸을 눕혀 막 자려고 하는데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서 떼거리가 몰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다락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가만히 들어보니, 들어온 놈들이 죄다 도깨비들이었다.
빈 집이 아니라 도깨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우 눈을 젖가락으로 찔러..."
목소리가 굵고 커서 대장인 듯한 녀석이 일일이 점호하듯 동료를 불렀다.
“음, 다 모인 것 같군. 자, 그렇다면 각자 갔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보아라.”
도깨비들이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집 며느리가 방귀 뀌다 똥싼 이야기, 어느 집 머슴이 일하기 싫어 하루 종일 주인과 숨바꼭질한 이야기, 어느 집 아이가 시렁 위에 올려둔 꿀 훔쳐먹다 단지째 깨뜨린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를 다 하였다.

그때 도깨비 한 놈이,
“내 오늘 별 희한한 일을 다 보았네. 어떤 욕심 많고 사나운 형이 아우 눈을 젓가락으로 찔러 소경을 만들어서 내쫓더군.”
하더니 혀를 쯧쯧 찼다.
듣고 보니 자기 이야기였다.
동생은 형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귀를 더 기울였다.
그런데 목소리가 가는 도깨비가 그 말을 듣더니,
“사람들은 참 바보야. 그깟 눈 안 보이는 것쯤 쉽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단 말이야.”
코웃음쳤다.

다른 도깨비들도 한 마디씩 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하지.”
“그 형이란 작자는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 전에도 맨날 동생 구박하고 때리면서 제 욕심만 채우려던 녀석 맞지?”
“맞아, 맞아. 어쨌든 그 동생이 불쌍하게 되었군.”
“그래, 내가 내일 그 동생한테 가서 소경 된 눈에는 이 산 동쪽 바위 아래 샘물에 눈을 씻고 그 옆에 있는 버드나무 이파리를 따서 문지르면 도로 밝아진다고 알려줄까?”

"인간들은 죄다 어리석고 바보 같아"
그러자 대장이 소리쳤다.
“아서라. 우리가 인간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법을 모르느냐?”
잠시 조용하더니, 한 도깨비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았어. 재 너머 부잣집 외동딸이 앓아 누운지 벌써 석 달째잖아.”
“맞아, 그 병에는 지붕 용마루 밑 천년 묵은 지네를 잡아다 들기름에 튀겨 죽이면 낫는데, 그걸 모르고 죽기만 기다리니. 원, 미련하기가 한이 없어.”

그러자 다른 도깨비는,
“참, 사람들 미련한 것은 말로 다 못해. 요 아래 동네는 가물어서 농사를 못 짓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잖아.”
“그래그래, 한숨만 내쉰다고 비가 오나 물이 솟구치나? 동네 한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들치면 그 아래 물길이 있어서 물이 많이 나오는 걸 모르고 저 고생일세.”
집이 들썩이도록 떠들다가, 새벽닭이 울자마자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도깨비들의 말을 확인해 보아야지.”
동생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더듬더듬 동쪽 바위를 찾아갔다.
눈이 안 보이니 어떤 바위인지 몰라 바위가 나오면 그 아래를 더듬어 샘물이 있는지 찾았다.
드디어 다섯번째 바위 아래를 더듬어 보니 과연 샘물이 있어 그 물로 눈을 씻고, 옆에 있는 버드나무 이파리를 따서 눈에 대고 문질렀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눈이 번쩍 뜨이면서 전보다 더 잘 보였다.
“아아, 사실이구나. 고맙다, 도깨비들아.”

"믿고 맡겨 보십시오"
동생은 자신감을 가지고 그 길로 재 너머 부잣집을 찾아갔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니 서둘러야 하겠구나.”
동생이 찾아가서 우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니 그 집 주인이 불문곡직하고 내쫓았다.
지금 금이야 옥이야 키운 외동딸이 다 죽어가는 판국이라 손님을 들일 형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내가 우연히 들은 비방이 있습니다. 이 집 따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믿고 맡겨 보시지요.”

그랬더니 비로소 주인이 들어오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하도 그런 사람을 많이 겪은 탓에 별반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떻든 밥을 한 상 잘 대접하고는,
“그래, 어디 한번 고쳐 보시게.”

동생은 그 집 가마솥에 들기름을 넣어서 끓이라고 이르고는 지붕에 올라갔다.
기왓장을 벗겨내고 보니, 과연 용마루 밑에 어린애 팔뚝만한 지네가 흉물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잡아다 들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튀겨 죽였다.
그러고 나니 외동딸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주인은 고맙다고 돈을 많이 주었다.
“아니옵니다, 아버님. 이미 제 목숨은 저 분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제가 보기에 심성도 남다르고 눈에 총기가 있어 제 몸 의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합니다.”
이리하여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심성이 곱고 눈에 총기가..."
혼례를 올리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며 가물어서 농사를 못 짓는다는 동네에 갔다.
가보니 과연 거북등 같은 논바닥만 쳐다보며 눈물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동생은 동네 한 가운데 큰 바위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바위를 치우게 했다.
그러자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넓은 들판에 물을 흥건히 대고도 남을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이 고맙다고 또 돈을 모아주었다.

동생은 그 돈을 가지고 집고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서 부잣집 딸과 함께 잘 살았다.
형의 소식이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지만 끝까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냥할 마을을 혼자 독차지한 형은 이내 그 사실을 안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쫓겨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내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