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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뺨치는 우리 옛이야기

재테크 수칙-'남편은 두레박, 아내는 항아리'

거문고 소리와 파랑새 한 마리

옛말에 ‘남편은 두레박이고, 아내는 항아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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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으로 길은 물을 항아리에 저장하듯이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아내가 저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른들이 “총각 때는 돈 못 모으는 법"이라며 결혼을 재촉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말도 있다.
‘내주장(內主張)이 밥은 안 굶는다.'
남편 대신 아내의 주장이 강해 집안 일을 돌보게 되면 적어도 경제적으로 곤란하지는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 집 가운은 남의 집 처녀에게 달렸다'고 했으니, 집안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며느리에게 달렸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당부를 귓등으로 흘려 듣지 말고 따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마누라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려는 속좁은 사내가 있다. 많다.

아내의 당부를 귓등으로 흘린 한 사내가 있었는데.

한심하고 처령한 총각
옛날에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이 살았다.
열심히 일하고 부모님을 모셔왔지만 늘 가난하였고, 이제는 부모님까지 돌아가셔서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지 몰라 한숨이 터져나올 때가 많았다.

하루는 총각이 논에서 김을 매는데, 생각해보니 제 신세가 참으로 한심하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해도 관아에서 반 넘어 걷어가버리고, 해마다 살림은 쪼들리기만 했다.
전 같으면 늙으신 부모님 때문에라도 참고 일을 했는데, 이제는 거두어 먹일 가족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해 힘들지만 서로 힘이 되어주며 살아가는데, 가난 때문에 장가도 못가고 사는 처지를 생각하니 절로 서글퍼졌다.

“어휴, 이 농사를 지으면 뭘 하나?”
입버릇처럼 중얼중얼 신세 한탄을 했더니,
“색시랑 같이 먹고 살지, 뭐.”
어디선가 작게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여자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지만,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소리의 임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몇 번 두리번거리다가 잘못 들었나보다 하고, 다시 김을 매며 신세한탄을 했다.

"색시 얻어 먹고 살지"
“힘들게 농사 지어서 무엇 하나?”
“색시 얻어 같이 먹고 살지, 뭐.”
총각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그 목소리였는데 아무도 보이지는 않고, 그것 참 이상하다 싶었다.
총각은 다시 김을 매는 척하고 소리가 난 쪽으로 슬금슬금 옮기며,
“부모님도 여의고 천애고아인 놈이, 고되게 이 농사 지어 무엇할까나?”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까와 비슷한 위치에서,
“나 같은 색시랑 같이 먹고 살지, 뭐.”
조금 더 분명하게 들렸다. 총각은 논의 한 군데를 주시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거기 누구요?”
누가 숨어서 그러나 싶어 물었지만 대답이 없자,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꼭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총각은 다시,

"눈 앞에 있는 색시 왜 못 찾아?"
“색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보이지 않네.”
했더니, 곧 가까운 데서 소리가 들려왔다.
“평생배필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왜 못 볼까?”
논두렁 밑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풀포기를 헤쳐보니 커다란 우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렇게 큰 우렁이를 처음 본 총각은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껍데기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마치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처럼.

그러나 사람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일세. 하하…… 그래, 너라도 내 색시가 되어주거라."
총각은 그 우렁이를 집에 가지고 가서 부엌에 있는 항아리 안에다 넣어두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총각이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새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또 논에 나갔다가 점심 때 돌아오면 따뜻한 점심상이 차려져 있고, 저녁에 돌아오면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총각은 이렇게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 딴 세상에 온듯 기분이 좋으면서도, 누가 그랬는지 궁금해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누가 나 없는 동안 밥상을 차려 놓았을까? 혹시 어머니가 혼자 사는 아들이 불쌍해 혼령으로 오셨나? 하지만 이것은 예전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아닌데.’
총각은 하도 궁금해서 다음 날 일하러 가는 척하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선반 위에 올라가 숨었다.

색시는 좌우를 살피더니 살며시...
점심 때가 가까워 오니까 우렁이를 넣어둔 항아리에서 어여쁜 색시가 누가 있나없나 살피더니 살며시 나왔다. 선녀 같이 곱고 아리따운 색시가 부엌에 들어가 달각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점심상을 차려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하, 저 색시가 바로 우렁이 속에서 나왔구나.’
색시는 다시 항아리로 들어가려고 했다.
총각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선반 위에서 얼른 내려와 막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색시 치마를 꼭 붙잡았다.

“잠깐만, 거기 들어가지 말고 나를 좀 보시오.”
그러니까 색시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됩니다, 아직은.”
“아직이라니요? 당신이 내가 논에서 일할 때 내 색시가 되어 준다고 하지 않았소?”
색시는 여전히 난처하고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처음부터 당신께 몸을 의탁하기로 작정하고 왔으니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그러나 천상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몸이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때가 차지 않고 같이 살게 되면 언젠가 슬픈 이별을 하게 됩니다.”

총각은 색시의 말을 듣지 않고...
색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총각은 듣지 않았다.
못 보았거나 몰랐다면 붙잡지도 않았겠지만, 모습을 보고 얘기까지 나눈 색시를 다시 항아리 안에 들여보내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지금 놓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처럼 치맛자락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색시는 그 날부터 총각하고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총각은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고운 색시를 아내로 맞아 살게 됐다.
혼자 어렵고 힘들게 살다가 꿈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신바람이 났다.
색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전보다 더 부지런히 일을 했고, 팔불출처럼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침이 마르도록 색시 자랑을 늘어놓았다.

결국 그 마을에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급기야 은근히 색을 밝히기로 소문난 고을 원까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우리 고을에 있단 말이냐?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보아야겠다.”
서둘러 길을 나서니 관아는 온통 난리가 났다.
한쪽 구석에서 졸던 통인이 눈을 비비며 허둥지둥 뛰어나오고, 고의춤 풀어헤쳐 오줌 누던 가마꾼 물건 털 새도 없이 헐레벌떡 대령하여, ‘에이, 물렀거라. 에이 섰거라.’ 벽제 소리 요란하게 떼를 지어 행차에 나섰다.

여자 밝히기로 소문난 원님은...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논일을 하러 간 남편의 일거리가 많았다.
점심 때가 되어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서 점심 먹으러 집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기다리던 색시는 점심밥을 차려 놓고 한참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서 점심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했다.
가다가 그만 떼지어 오는 고을 원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에이, 물렀거라. 에이, 섰거라.”
색시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얼른 길 아래 풀덤불 속에 숨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고을 원이 가만히 보니, 저 아래 풀덤불 속에 훤하게 서기가 비쳤다.
원이 잠시 행차를 멈추게 하고 통인에게 분부했다.
“냉큼 저 풀덤불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통인이 풀덤불로 다가가 보니, 처음 보는 눈부시게 예쁜 색시가 숨어 있었다.
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색시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을 했다.
“저는 남편이 있는 몸입니다. 부탁이니 제발 아무 것도 없더라고 해주십시오.”
남편이 있건 없건 원에게 잡혀가면 꼼짝없이 소실이 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통인은 색시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원에게 돌아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이다.”
아뢰었다.

색시가 있는 곳에서 서기가 뻗치고...
그러자 원이 노발대발하며,
“이놈, 서기가 뻗쳐 십리 밖에서도 보일만 한데 아무 것도 없다니 말이 되느냐? 다시 가 보아라.”
호통을 쳤다.
통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어 난처해하자 색시는 신고 있던 신 한짝을 벗어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사또께 이것밖에 없더라고 해주십시오.”
통인이 신을 받아들고 원에게 가서 짐짓,
“이것밖에 못 보았습니다.”
고하였다.

그런데 원은 아직도 서기가 비친다면서 다시 가보라고 명했다.
통인이 할 수 없이 다시 어기적거리고 색시한테 와서 어쩔 도리가 없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색시가 이번에는 끼고 있던 은가락지를 빼주면서,
“이것이 햇빛을 받아 빛을 내더라고 해주세요.”
통인은 한두 번 봐준 거 세 번 못 봐주랴 싶어, 그 은가락지를 원에게 갖다바치며 이것밖에 없더라고 했다.
그러자 원이 벌컥 화를 냈다.
“이놈아, 신발과 가락지를 가지고 왔는데도 아직 서기가 그대로이지 않느냐. 네가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거짓을 고하면 네 혀를 가만 두지 않겠다. 네 수작을 보아하니 분명 사람이 있다. 냉큼 데려오지 않으면 큰일 날 줄 알아라.”
이젠 통인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색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내 혀가 뽑힐 판국이니 어서 가자. 네 사정을 봐준 만큼 이제는 나를 좀 살려다오.”

끌려온 색시를 보고 입이 헤 벌어져...
끌려온 색시를 보고 원은 그만 입이 헤벌어졌다.
남편이 논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제발 보내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하고 매달려도 안 되었다.
“네 이년, 나오랄 때 나올 일이지 나를 속이려 들어? 네 죄가 크니 가만 둘 수 없다.”
원은 경국지색보다 더 아름다운 선녀 같은 색시를 데려갈 수 있는 핑계가 생겨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해서 색시를 잡아가면서도,
“어허, 거 다칠라. 살살 다루거라.”
제 속셈을 빤히 드러내 놓았다.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해가 다 기울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가다보니 밥과 찬을 담은 광주리가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데, 보니 색시가 쓰던 것이라.
불길한 생각에 돌아와보니, 과연 아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아내가 고을 원에게 잡혀갔다는 걸 알았다.
선 자리에 주저앉아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데, 일 욕심 부리지 말고 점심 먹으러 제때 돌아올걸, 미리 힘들게 광주리 이고 논밭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걸, 고을 원 행차를 보면 아예 멀찍이서 줄행랑을 치라고 일러둘 걸, 후회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왜 마누라 말을 듣지 않았나..."
“아아, 맞아. 색시가 ‘때가 차지 않고 같이 살면 반드시 슬픈 이별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왜 내가 그 얘기를 듣지 않았던가.”
문득 색시의 말이 생각나서 가슴을 치며 뉘우쳤지만,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아내를 돌려주시오.”
그 날부터 남편은 날마다 관아 앞에서 아내를 애타게 찾았다.
그러다가 사령들에게 잡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지만, 그 다음 날이면 다시 관아 앞에 와서 아내를 찾고는 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밥먹듯 매를 맞으니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그렇게 몇 달을 두고 아내를 부르며 통곡하던 남편은 그만 죽고 말았다.
죽은 남편은 한 마리 파랑새가 되어 날마다 아내가 사는 관아의 뜰에 날아들어 애처롭게 울었다.
우렁이 색시도 남편 생각에 눈물로 밤낮을 시름과 한숨으로 지냈다.
하루는 거문고를 타면서 남편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파랑새 한 마리가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거문고 가락에 화답하듯 지저귀었다.

색시의 거문고 소리와 파랑새 한 마리
마침 이곳을 지나던 원은,
“그대 거문고 소리가 저 파랑새 소리와 어울리니, 마치 한 마리 원앙이 정답게 어울려 노는 듯하오.”
감탄하며 거문고 솜씨를 칭찬했다.
그러자 우렁이 색시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대답했다.
“저 파랑새는 색시를 못된 원에게 빼앗기고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원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그러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뭐라고? 못된 원……에게 죽은 남편이……환생을 해?”
화를 참지 못한 원은 옆에 있던 목침을 집어 던졌다.
우렁이 색시는 목침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때 우렁이 색시의 머리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올랐다.

남자의 거기가 썩어 들어가 죽고...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뒤로 파랑새 두 마리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반면 십여 명의 후실을 두었던 원은 얼마 안가 이상하게도 그곳이 썩어들어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