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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박경리 선생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

 

박경리 선생 자전적 요소 담은 단편들
『환상의 시기』, 박경리, 나남/솔

오늘부터 하동에서 토지문학제가 열린다.(사실은 지났다. 지난 11일과 12일 이틀간 열렸는데, 이 글은 그 전에 씌여진 것이다.)
특히 올해 문학제는 5월 타계한 박경리 선생의 추모제 형식이어서 더 이목을 끈다.
그래서 예년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토지』만 찾는 독자들, 혹은 아무것도 안 읽는 사람들
그런데 박경리 문학의 독자가 남녀노소로 다양하고 많지만 대개는 대하소설 『토지』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같은 선생의 대표 장편소설 정도거나.
물론 이것도 저것도 안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하다.

하지만 선생이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깊은 슬픔과 비극적 고통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살피는 데 단편소설만한 것이 없다.
초기 단편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상당부분 나타나고 있거니와 중기 장편소설, 그리고 역작 『토지』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픈 가족사, 그리고 강인한 여성으로의 변모
단편 「반딧불」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남은 가족의 아픔에 대한 자전적 요소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부재는 여성 억압에 대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점점 더 차갑고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해간다.

「흑흑백백」의 주인공 혜숙, 「불신시대」의 진영, 「암흑시대」의 순영은 모두 6.25 때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다.
남편에 대한 사건이나 추억은 없고 남편의 부재로 인한 여성 주인공들의 가장 역할의 고통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선생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남다른 시각 바탕으로 세상의 속물성 까발리기
특기할 만한 것은, 작품에서 대부분 남편이 폭사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선생이 전쟁에 대한 어떠한 이데올로기적인 접근도 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는 대다수 전후 작가들이 전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분단과 상실의 아픔을 그려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부분이다.
그만큼 선생의 시각은 남달랐다.

어린 아들의 죽음도 자주 등장했다.
「암흑시대」가 아들이 죽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후속편인 「불신시대」는 아들의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들이 죽음을 둘러싼 정황들을 통해 세상의 속물성과 부패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생명,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각
데뷔작인 「계산」을 비롯해 「군식구」, 「전도」 등을 통해서는 세상의 속물성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여주인공 진영을 입을 빌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불신시대」 중에서)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생명이란, 타락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각이다.
생명은 타자의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며, 현실의 속물성과 억압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이는 선생의 소설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토지』 읽었다고 박경리 안다고 할 수 없다
뱀 다리.
독자들이 편식이 아닌 깊이 읽기를 통해 선생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환상의 시기(나남문학선 36) 상세보기
박경리 지음 | 나남 펴냄
표제작 외 단편 19편을 모은 원로 여류작가의 작품선 집.
환상의 시기 상세보기
박경리 지음 | 펴냄
박경리의 등단작인 을 비롯하여 군식구, 전도 등 대표단편 7편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