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이》 필립 포레스트, 열림원
그런데 내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하루아침에 아이가 증발했다가 결국 죽은 채 발견되는 '잔혹한 동화'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담뱃갑이나 공공요금 고지서, 우윳곽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한 번씩 그 아이들의 부모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곤 한다. 아이가 사라졌다든가 혹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면…. 금방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하지만 어느새 다시 끈덕지게 들러붙곤 한다. 그럴 리 없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더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좀 다른 경우긴 하지만, 《영원한 아이》도 아이를 잃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납치나 유괴가 아니라 골육종이라는 암으로 3살난 아이를 떠나보낸 것이다. 하지만 유괴든 암이든, 아이를 잃은 고통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 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 쓰디쓰게 끓어오르는 울분"에 몸부림치는 부모의 심경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프랑스 작가 포레스트는 고통을 억누른 채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이를 생각하며 참았을 눈물과 한숨이 문장마다 배어있다. 아파하는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여 어쩌겠는가. 대신 그는 가슴을 치며 말한다. "내 딸아, 널 공포와 근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데려다놓은 우릴 용서하렴."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가 두 아이를 잃고 쓴 400편 이상의 시 가운데 5편을 골라 말러가 완성한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역시 가슴에 묻힌 아이를 그리워하는 부모의 고통이 절절히 묻어난다. "이 스산한 날씨에, 이 울부짖는 강풍 속에/이 맹렬한 폭풍우 속에서/그 애들은 잠들고 있을 거예요."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부모는 편안히 잠자지도 배부르게 먹지도 못한다.
소설 속에는 셰익스피어, 조이스, 위고, 말라르메 등 자식을 가슴에 묻은 작가들이 나온다. 자식을 잃고 광기어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과 심정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딸이 떠난 해를 '생애 가장 아름다운 해'였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 흘러갔지만 그 순간들은 언제까지나 부모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가 부모 곁에 있는 것과 비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서글픈 일이 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아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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