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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광우병, 대운하, 양심과 윤리가 뒷전인 나라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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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사람은 본래 가지지 못했을 때보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 것을 더욱 크게 느끼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더 어렵고 힘들었을 때보다 가장 잘 살았던 때를 기억하고, 그 때로 돌아가거나 더 나아지기를 원했다. ‘내 것’을 빼앗겼다는 것에 분노하고, 그것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본능만 살아 그에 따라 움직였다. ‘내 것’을 되찾는 모든 행위는 합리화되고 양심이나 윤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여기는 ‘눈먼 자들의 도시’, 혹은 그런 자들의 나라. 처음에는 한 사람이 운전을 하는 도중 눈이 멀어 버린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흔히 상상하는 깜깜한 어둠의 ‘눈멈’이 아니라 온통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실명이다. 그를 치료하려던 의사, 선글라스를 낀 여자, 차도둑, 엄마 잃은 아이, 나중에는 눈먼 자들을 격리 수용한 곳을 지키던 군인들까지 도시 사람들 모두 실명한다.

도시라고 했지만 특정 장소가 지칭되어 있지 않다. 몇 년 몇 월 몇 일, 시간도 제시되어 있지 않은, 과거일 수도 있고 오늘이거나 내일일 수도 있다. 이유나 원인도 없다. 왜 그 사람들인지, 어떤 과학적 근거로 실명을 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백색질병’에 빠르게 전염되어갈 뿐이다. 눈을 멀쩡히 뜨고도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책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화장실을 찾아가기 힘들어 아무 데나 배변을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배변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다닌다. 우리에게는 빤히 보이기 때문에 구역질이 날만큼 더러운 그 일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그것은 심지어 음식을 먹는 대가로 자신의 아내까지도 ‘바치는’ 윤리적 파탄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래, 우리는 윤리를 버리고 경제를 택한 도시, 그런 나라에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윤리와 양심을 지키려는 사람이 있다. 유일하게 멀쩡한 안과의사의 아내, 그녀가 병든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끔찍한 식량 쟁탈전, 오물투성이의 격리소, 무질서, 살인, 굶주림 등 그 생지옥 속에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고 돕는다. 지금, 우리에게 ‘그녀’는 어디에 있고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가.

그녀의 마지막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이 멀었지만 본다는 것이든,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눈먼 자들이고, 그렇게 도시를 혹은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아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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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지음 | 해냄출판사 펴냄
98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으로 인간 본성에 강한 의문을 던지는 저자의 문학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이 보게 된다면 이 라는 가상의 설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