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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친일작가 유치진과 가상인터뷰(2)둘째 날

친일작가 유치진과 가상인터뷰(2)둘째 날 : 껄적지근

하아무(소설가)

하아무 | 사실 오늘 선생님과 나누게 될 이야기가 저희로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구요, 선생님으로서는 괴로울 수 있겠는데요, 중기, 즉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에 대한 이야깁니다.
유치진 | 어험,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요.

하아무 | 우선 선생님께서 느끼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유치진 | 시쳇말로 살벌했지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징병제를 실시해 우리 젊은이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그 뒤 징용제가 실시되고 어린 처녀들까지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지요. 그리고 사상범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 1941년 ‘국가보안법’을 실시했습니다. 이 국가보안법이 해방 후에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살아난 것은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두고두고 민주화운동 진영을 옭아매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아무 | 연극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되지요?
유치진 | 하아-. 1940년 12월에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었고, 다시 1942년 7월에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가 통합되었어요. 그리고는 일어극(日語劇) 장려를 강요하고, 대동아공영권이니 국민총동원령 같은 군국주의를 홍보하는 ‘국민연극’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선생은 일본말로 ‘간쓰메’를 아시오? 그래요, 우리 말로는 통조림이지요. 규격화된 통조림 통에 억지로 쑤셔 넣고 그 통에 맞춰버리는 것이지요. 그 통에 맞지 않으면 버려지는 것이에요. 우리는 말하자면, 그런 신세였습니다.

하아무 | 글쎄요, 그건 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씀 같은데요. 선생님이 일제에 의해 통조림 통에 억지로 맞춰져 들어갔다기보다 오히려 연극인들과 연극계를 쑤셔 넣은 쪽이라는 의견이 더 많은 게 사실이거든요. 가령 선생님이 직접 쓰신 <북진대 여화>란 글에서 뭐라고 하셨냐면 “러일전쟁 때 구 일진회 간부들로부터 당시의 추억담을 듣곤 했는데, 그에 감동을 받고서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운 체험담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고, 그래서 탄생한 연극이 대표적 친일극인 <북진대>였다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한 이재명은 “유치진이 주도한 극단 현대극장은 의도적으로 국민연극을 표방하면서 국민연극연구소를 만들었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유치진은 연극계 최고의 헤게모니를 쥔 인물이 됐으며, 이후 관 주도로 시찰도 하고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란 말이지요.
유치진 | 그건 아니에요. 내가 자서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국민연극을 주도한 현대극장을 조직한 것은 내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총독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어요.

하아무 |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연극평론가 박영정에 의하면, “유치진은 현대극장이 창립되기 이전에 이미 국민연극 지도기관인 조선연극협회 이사로서 국민연극의 주요 사업을 제안할 정도로 국민연극에 적극적이었다”고 밝혔고, 선생님 자신이 1941년 6월 조광에 쓴 <원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서도 “연극이 국가적인 보호를 받을 때 보다 왕성하고, 국민연극이야말로 연극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적극적으로 피력하신 바 있습니다.
유치진 | 그, 그랬는가? 어험, 험-.

하아무 | 좀더 구체적으로 그 시기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90년 통영 남망산공원에 선생의 흉상이 건립되었다가 시민단체들이 철거운동을 벌여 결국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유치진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또 1991년, 당시 문화부가 4월의 문화인물로 선생을 선정하고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하려다가 철회한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 중기에 쓴 친일작품을 문제 삼은 것인데요, 이 시기 대표작으로 <흑룡강>과 <북진대>, 그리고 <대추나무>가 있습니다.
유치진 | 이 작품들을 상연한 후 주위 평자들은 입에 바른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작가정신을 외면하고 일제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가책과 치심으로 거리에 나가기조차 싫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들 원고를 모두 없애버렸어요.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웠던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아무 | 그 답변은 1975년에 나온 선생님의 <동랑자서전>에 나온 그대로인 것 같군요.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인데요, 그 부분에서 저는 의문이 생기더라구요.
유치진 | 놈들의 탄압이 유독 나한테 더 컸었다니까요.

하아무 | 친일연극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흑룡강>이 1941년 나왔는데 그 전 해인 1940년에 조선연극협회 이사로서 국민연극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거든요.  1941년 2월 춘추에 게재한 <신체제하의 연극-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에서 전체 협회가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어 도저히 끌려가는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당시 선생님은 ① 연극학교 설립, ② 극본의 사전검열을 위한 극본감독부 설치, ③ 협회의 잡지 발행, ④ 연극상 제정, ⑤ 연극인 공제회 조직 등과 같은 탄압을 받고 억지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어려운 일들을 제안하고 있거든요. 이에 대해 박영정은 “유치진에게는 조선 신극사에서 처음으로 당국의 탄압 없이, 나아가서는 당국의 ‘지원’ 아래 연극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에 ‘암흑기’의 사업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업 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면서, “단지 일제 당국의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당시 연극인들의 ‘자발적’ 참여 과정과 결부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유치진 | 아니, 그건 말이요, 나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고…….

하아무 | 그랬지요. 함세덕, 조천석, 임선규, 박영호, 송영, 함대훈, 서항석, 주영섭, 이원경, 이백수, 강홍식, 전옥, 김양춘, 김동혁, 마완영, 이해랑 등 조선연극협회든 카프든 대부분 친일의 길을 걸었지요. 누구 말마따나 일제하에서 활동했던 지식인치고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 문제는 나중에 더 검토하기로 하구요, <흑룡강>과 <북진대>, <대추나무>의 내용이 어떻기에 친일극이라고 하는지 궁금하군요.
유치진 | 만주에서 조선 농민이 일본영사관의 보호 아래 원주민인 만주인들의 학대와 멸시를 견디고 복지 만주의 터전을 닦아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민족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를 개간하고 옥토화하려는 당시 일제의 국책에 호응해서 쓴 작품이지요.

하아무 | 그런데 선생님은 1941년 상연한 이 작품에 대해 매일신보에 <흑룡강 상연에 제(際)하여>란 제목으로 “만 2년에 걸쳐 5차의 퇴고를 거듭한 조심루골(彫心鏤骨)의 야심작으로, 소박하고 거칠고 야성적인 것을 리얼한 면에서 취하여 대륙기질의 다이나믹한 박진력을 비열(沸熱)된 이념의 승화”시켰다고 썼더군요. 그리고 1942년 7월 대동아라는 잡지에 만주개척 이민을 옹호하는 <북만(北滿)으로 향하면서-작가개척지행>이란 글도 썼구요.
유치진 | 예, 만주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떠나면서 쓴 글입니다만, 아다시피 억지로 쓴 것이지요.

하아무 | 그리고 이듬해인 1942년 선생님은 더욱 친일적인 작품 <북진대>를 발표합니다. <북진대>에 대해서도 말씀 좀 해주시지요.
유치진 | 그 내용이 삼천리라는 잡지에 나왔었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8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일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 군수품 수송, 또 러시아에 잠입해 적정을 탐색하는 등 한일합병에 헌신하는 모습과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조선이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아무 | 결국 한일합병에 공이 있는 매국노 이용구를 영웅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일제가 표방하는 내선일체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었군요. <북진대>의 창작의도를 밝히기도 하셨군요. “한일합방에 의연히 매진함으로써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명시한 것으로, 금일의 내선일체는 명일의 대동아 건설의 초석이 된다는 선구자적 기개를 그려낸 군중극”이라고 하셨네요.
유치진 | 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세 작품, 즉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 중에서 <대추나무>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전혀 친일적인 요소가 없는 작품이에요. 내가 생전 누차에 걸쳐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하아무 | 일명 ‘<왜 싸워> 논쟁’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 바로 그 작품 말씀이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추나무>가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 먼저 얘기를 해주시지요.
유치진 | <흑룡강>이나 <북진대>의 경우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제 손으로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대추나무>는 전혀 그런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1957년에 <왜 싸워>라는 제목으로 개작했던 것입니다. 친일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 같으면 제가 무엇 때문에 그걸 다시 들고 나서겠어요. 그래봐야 내 무덤을 내가 파는 꼴이 되고 말텐데. 내 자서전을 봐서 알겠지만 <대추나무>는 쓸 때는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쓰기는 했지만 “다른 작품과는 달리 아첨하는 구석이 없”는 작품입니다. 작품상으로 <대추나무>는 그대로 재미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서슴지 않아요. 이렇게 내가 작가적 양심으로 아끼던 작품이라 친일작품으로 도매 취급당하는 것이 몹시 언짢아요.

하아무 | 하지만 <대추나무>는 1942년 가을 당시의 관제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주관했던 제1회 (친일)연극경연대회에서 작품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친일극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유치진 | 아니, 관변단체가 주관한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친일 작품입니까? 단순히 겉으로만 봐서는 그럴지 몰라도 내면으로는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다룬 작품이에요. 겉이 아니라 내용 그대로를 봐야지요. 내가 나타내려고 했던 핵심 말이오.

하아무 | 그러나 제가 가진 자료는 다릅니다. <대추나무>를 발표하던 해에 굉장히 바쁘셨던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2월에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며>, 7월에 <개척과 희망>, 10월에 <창성둔에서> 등 수필을 연이어 발표했군요.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며>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내용이었구요, 그 해 여름 직접 만주지역을 시찰하고 쓴 것이 <개척과 희망>, <창성둔에서> 등이군요. 두 편 다 당시 일제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분촌(分村)운동을 충실히 반영해 한국인의 만주 입식을 독려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대추나무>가 수필 <창성둔에서>의 사례를 그대로 희곡화했다는 오해를 받을 만큼 당시 한국 농촌이 살기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웃간에 아웅다웅하고 살 일이 아니라 광활한 만주로 이주해 가면 넓은 농토에 자작농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는 분촌운동 선전극이라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원작인 <대추나무>에서 분촌운동을 독려하는 부분만 살짝 빼버리고 개작한 것이 <왜 싸워> 아닙니까? 그리고는 원래 <대추나무>에서는 일제에 협조하기로 마음먹은 등장인물들이 만주로 떠나간다는 내용인 반면, <왜 싸워>는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살짝 바꿔치기해버린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유치진 | 아니, 그거는 그렇게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닌데……. (말을 끝내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가상 인터뷰 (3) 데면데면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