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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시인 권환(2)과연 ‘권환+민족’이 합당한 것인가

‘권환’을 어찌 할 것인가?

 

 



여기, 우리 앞에 쌀 닷 섬들이 박이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그 어떤 박보다 크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보기 드물게 큰 박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손 안 트게 하는 약이라고 해도 좋다.

혜자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좋은 바가지나 약이 얼마나 많은데, 그딴 걸 어디다 써? 버려!”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묵고 살기 바빠 죽것는데 그런 바가지나 약을 머 우짜란 말이고. 치아라, 고마.”

그래서 ‘권환’은 버려졌고 잊혀졌다. 그리고 가까스로, 간신히, 겨우겨우, 천신만고, 백고천난(百苦千難) 끝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불려나온 것이다. 여러 편의 석․박사 논문이 씌어졌고 여러 잡지에 관련 글이 실렸다.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다른 이름으로 발표된 그의 작품이 새로이 발굴되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5월 22일, 제 1회 권환문학제가 열려 권환 시인이 마침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잡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제 4회 권환문학제 행사장에 가봤다. 그런데 썰렁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일원은 행사가 열리는지 마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오전에 요 앞에서 개회식허고 백일장 할 때는 사람들 있었는데, 그거 끝나고 싹다 가삐맀는 갑어예. 작년꺼지는 그래도 시인들이랑 쪼까 오는거 같더이마는 올개는 여엉 한산해지삐릿어예.”

권환이 공부했다는 경행제 앞 구멍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머니에게서 담배를 받아든 필자는 행사일정표를 확인해 보았다. ‘문학정담회’가 열릴 시간이었다. 정담이라……, 정담(情談)일까? 설마……. 그렇다고 정담(政談)은 더더욱 아닐 테고, 정담(鼎談)이겠지. 정담회가 열리는 면사무소 강당에 들어갔다. 헌데 정담(鼎談)을 하기에는 사람이 많고, 발제나 토론하는 내용으로 보아 정담(情談)도 아니어서 혼자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스스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참나, 나는 왜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은 이런 문제로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집중! 필자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참가자들은 ‘권환민족문학관 건립’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주제발표를 한 경남대 박태일 교수는 건립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했다. “한국 근대민족문학사의 큰 줄기를 갈무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단순한 보존·전시공간이 아니라 지역문화 담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토론자들이 제기한 현실적 문제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과연 ‘권환+민족’이 합당한 것이냐(오인태 시인), 문학관 건립에 대해 보수적 성향의 지역사회가 동의할 것인가(이순욱 평론가), 더구나 아직까지 '권환'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도내 문인들도 많다(하영 시인)”는 지적까지 나왔다.

아, 박은 분명 큰 박인데 어찌 써야 할지 의견들이 분분한 모양이구나. 아직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사람도 많고.

답답한 마음에 정담회장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경행제로 향했다. 권씨문중에서 1867년 건립한 재실이었다는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권환의 부친 권오봉이 사립 경행학교를 설립해 교사로 사용했다. 권환도 1922년 고향에 남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갈등하다 야간도주해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공부했던 곳이었다.

팔랑팔랑 아래위 좌우 종작없이 날갯짓을 하는 배추흰나비를 따라 경행제 문을 들어섰다. 마당에는 의자가 빼곡이 들어차 있고 처마로부터 문학제 개막식 식순이 명기된 펼침막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렇게 흔적은 있으되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마치 모든 행사가 끝나버린 쓸쓸한 공연장을 연상케 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로 시작하는 노래, 그런 분위기 말이다.

필자는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에 등을 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루도 쓸어보고 발로 주춧돌도 굴러보았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들보며 문설주를 이리저리 보다가 코를 벌름거려 고택의 냄새를 가려 맡아보기도 했다. 그러자 아, 조금 전 나를 이끌던 배추흰나비처럼 몸이 가벼워지면서 가뿐히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비가 된 듯, 혹은 나비가 내가 된 듯. 허어, 이거 정말 색다른 경험이로고. 배추흰나비란 놈이 본시 꽃을 찾아다니느라고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약하고 가녀린 녀석이라, 새들 먹잇감이 안 되도록 낮게 낮게 사뿐사뿐 다니지 않던가. 꼭 그렇게 내 몸이 떠오르는데, 마치 캠코드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대고 탐색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기분을 적당히 즐기며 경행제를 한 바퀴 돌고 왔을 때였다. 앞쪽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뭘 알아야 나서든지 하지, 이 사람아.”

하는 사람은 다소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목소리였다.

“아니, 그간 내가 여러 차례 설명하지 않았나. 그리고 자네 같은 사람이 나서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어.”

하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다.

필자는 가뿐히 날아올라 두 사람이 잘 보이는 기둥에 앉았다. 훔쳐보기의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긴장감과 희열이 합쳐져 마치 뭔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이룬 듯한 기분에 도취되었다.

두 사람 다 아는 이들이었다. 수세적인 목소리는 자치단체 공무원이면서 시(조)도 쓰고 수필도 쓰는 갑(甲)이었다. 오래 전부터 작가란 명패를 달고 다녔지만 그리 적극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정부미’를 먹어온, 혹은 ‘정부미’라고 불리어 온 덕에 자치단체 내에 제법 ‘말빨’은 있는 편이었다. 권환문학제 시작부터 직․간접 관여해온 터라 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뭘 알아야 나서든지 하지”란 말은 다분히 회피성 발언으로 들렸다. 공세적인 목소리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작품도 쓰고 평론까지 하는 을(乙)이었다. 그는 권환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꽤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권환의 약력이 적힌 펼침막이 살랑거리고 있었다.(<권환의 문학세계>, 이덕화, 피어선논문집, 1994)

* 1903년 음력 1월 6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권오봉의 장남으로 출생.
* 7세 경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경행학교에서 수업.
* 서울 중동학교 중등과 졸, 1923년 휘문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3학년만 수료.
* 일본 야마가타 고등학교 졸업, 교오토 대학 독문과 졸업.
* 카프의 볼세비키화론 당시 무산자사의 일원으로 공산당 재건 조직의 임무를 띠고 서울로 옴. 카프의 2차 방향전환에서 카프의 조직개편을 임화와 함께 주도함.
* 1931년 10월, 카프 제1차 검거사건에서 검거, 곧 박영희와 함께 병보석으로 석방.
*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에서 박영희, 이기영, 윤기정, 한설야 등과 함께 검거.
* 1935년 12월 판결까지 미결수로 복역, 집행유예로 풀려남.
*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 조선여자 의학강습소 강사.
* 경성제대 도서관 촉탁.
*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2차 방향전환 후, 문학부 책임자와 기술부 책임자 역임.
*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조직위원.
* 1954년 7월 30일, 마산시 완월동 101-14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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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 지음 | 전망 펴냄
31년 카프 제2차 방향전환 중심인물이었으며 54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시인 권환(본명 권경완)의 문학 전반을 조감할 수 있는 전집. 발표순으로 정리한 시와 소설, 희곡, 평론과 산문을 통해 88년 해금 이후 여전히 우리 시야 밖에 머물던 시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