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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작가를 찾아서

권환 시인(3)프로문학의 정치노선화를 적극 주동

권환과 볼셰비키화 문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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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권환민족문학관 건립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의 대화가 꼭 혜자와 장자-철학적 배경까지 그러한지 알 수 없으나-와 비슷한 것만 같아 조금 더 엿듣기로 했다.

갑 : 좋은 취지의 사업이라지만 말일세, 위에서들 난감해 하니까…….
을 : 아니, 난감할 것 뭐 있나. 우리 지역 출신의 시인을 기리고 근대 식민지적 억압에 대한 유형․무형의 저항과 그 극복을 위해 고심했던 그 자산을 잇자는 것 아닌가. 박태일 평론가가 지난 2004년 ≪시와 비평≫ 8호였든가, 제 1회 권환문학제 기념 특집호에서 그러지 않았나. “권환을 둘러싸고 얽혀들었던 지역사회의 잊혀진 역사와 집단적 희생에 대한 복원은 근대 지역사회문화사를 새롭게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말일세. 그리고 “제 행색을 돌보지 않은 채 지역사회를 농단해대고 있는 낯 두터운 문화권력이나 집단, 그로부터 이득을 얻어보려는 허명 문학인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양심의 칼날로 권환 문학은 빛날 것”이라고도 했고.

갑 : 알지. 사실 권환문학제가 권환을 되살린 것도 있지만, 지역사회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었지. 지난 100년 동안 “지역사회는 그저 이은상이니 이원수만 들먹거리면서 그 그늘 아래 숨어버리는 손쉬운 길을 택해왔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 아래 빌붙어 작은 이익을 꾀하거나 자격 미달의 문화거간꾼․문학호사가들이 벌이는 비문화적 작태와 무지에 놀아나는 길을 따랐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지.
을 : 사실이잖나.

갑 : 아니,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 지역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걸 비판하면서 다시 거기에다 협조를 구하고 있지 않나 말일세. 그들에게 권환은 그렇게 알고 싶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어.
을 : 지역사회의 문학적 인습의 고리를 단호히 끊기 위해서는 이 정도 잡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

갑 : 아무리 어느 정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또 카프(KAPF) 작가들이 해금되어서 논의가 가능하다지만, 글쎄…….
을 : 뭐가 문젠지 자네 얘길 좀 들어보세.

갑 : 아니, 그렇지 않은가 말일세. 권환은 “1929년 프로문학운동의 성격을 자체적으로 규정지으면서, 1927년을 수난기라고 한다면 1929년은 ‘계급분석기, 소부르조아 청산기’”(<권환의 농민소설의 성과와 한계>, 김종호, 한국문예비평연구, 2005)라고 했네. 그렇게 권환은 임화, 안막, 김남천 등과 함께 김팔봉, 박영희 등의 문학주의적 프로문학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해 프로문학의 정치투쟁노선화, 즉 볼셰비키화로서 1931년의 카프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했지. 결국 권환은 “‘전위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는 프롤레타리아트 리얼리즘에 기초한 소장파 볼셰비키들과 1931년을 전후해서 카프 2차 검거가 있던 1934년까지 문단을 풍미하면서 프로문학의 정치노선화를 적극 주동해간 것”(<볼셰비키 프로시인, 權煥>, 김재홍, 한국문학평론, 2003)이 사실 아닌가.
을 : 그렇지.

갑 : 그런데 말일세. 볼셰비키 문학론이 뭔가. “노동자들의 모순된 삶과 강요된 굴종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적인 삶 속에 토대를 두고 자본가와 싸워나가는 계급투쟁 의식을 고취하는, 즉 선전 선동을 목적으로 작품을 쓰는 것”(김종호, 앞의 논문)이지 않나. 당시 권환이 발표한 비평글들을 보면 대단히 공격적이고 격렬했네. 예를 들어볼까? “발서 우리가 協同鬪爭하기에 너무도 利害가 乖異되는 부루 階級은 더욱 그 頭角을 놉히들어 XX帝國主義者와 野合하기를 公然히하며 中間에서 動搖하는 小브루 또 一時的으로 우리 陣營에 付寄해잇든 小부루는 秋風에 落葉가티 부루 陣營으로 沒落해 다라갓다”(<無産藝術運動의 瞥顧와 將來의 展開策>, 권환, 중외일보 1930. 1. 10)고 썼더군.
을 : 그런 덕분에 권환은 “1930년 4월 26일 열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중앙집행위원 회의에서 새로 설치한 기술부의 책임자로 선임”(<권환 문학 연구>, 이장렬, 경남대 박사학위논문, 2003)되었지. 그리고 “소설이나 시 등의 창작적 기술은 粗出하더라도 타협성이 적고 희생심이 많고 직업적 운동가의 소질을 가진 예술운동가에게 중임을 담담시켜야”(<조선 예술운동의 구체적 과정>, 권환, 중외일보 1930. 9. 2)한다는 주장까지 했고.

갑 : 그래. “조선의 현실과 작가대중, 노동자 농민 대중에 대한 구체적 인식 없이 성급한 ‘전위편중주의’적 관념론을 전개하여 예술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되기도 했다”(김종호, 앞의 논문)는 비판도 받고 있지. 그의 문학론은 지나치게 정치적 임무에 도식적, 기계적으로 도입되어 인식의 제한성을 드러내었다는 얘기지. 또 “작품 창작을 통하여 대중들의 프롤레타리아 의식화에 의해 자발적 투쟁을 유도하기보다는 공산조직 운동의 보조적 사업으로 예술운동의 의미를 협소”(이덕화, 앞의 논문)화 했다는 지적도 있네. 카프 내에서도 권환은 극좌파였단 건 우리 모두 인정하는 바 아닌가.
을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겠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그의 주장은 “계급투쟁을 통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보여준 것”이란 얘기지. 왜냐하면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현실저항의 방법론이 카프 해산 이후의 연극운동과 시와 소설, 평론 등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프로극의 한 유형-권환의 희곡>, 황선열, 경남작가 4호, 2003)이지.

갑 : 물론 그것이 권환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입장임은 알고 있네. 그게 타당하겠지. 하지만 연구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나 우리 자치단체 입장에서는 볼셰비키니, 계급투쟁, 아지프로, 공산조직 운동 따위의 용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네.
을 : 당초 권환문학제 제전위원회가 내세운 명분이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기에 걸쳐 계급주의 문학에 빼어난 시적 역량을 보여주었고, 사회변혁을 위해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권환 시인의 문학 자산과 그 정신을 기린다”는 것이었고, 1회 문학제 당시 축사를 한 자치단체장이 “예향 마산의 문학자산 갈무리와 마산정신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했음을 다시 상기해 주기 바라네.

평론, 소설, 희곡,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작품들

갑 : 담배 한 대 피겠네.
을 : 자네 아직도 담배 못 끊었나?

갑 : 휘유, 말 말게. 정부미 노릇 하자면 이것저것 눈치봐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몇 번이나 끊으려고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네. 당장 이 일만 해도 그렇지 않나.
을 : 음, 그래. 보수단체 같은 데서 반발이 만만치 않지?

갑 : 뭐, 그런 것도 있고……. 참, 권환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던데……. 권환이 ‘운동으로서의 문학’에 집중했던 만큼 문학운동가로서의 성취는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우리 문학사의 주류에 편입할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던데.
을 : 전 서울대 김윤식 교수 있지? 그런 대학자가 뭐라고 했냐면, “카프문학 또는 카프시학이란 그 자체가 독자적인 유형이어서 조선근대문학 또는 근대시사의 주류랄까 본류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그런 과도기적인 문학이 아니라”면서 “이런 독자성의 시선에 제일 뚜렷한 것이 권환 시학”(무작법의 시학-카프시의 전형으로서의 권환시학>, 김윤식, 시와시평, 2004)이라고 했다네. 그런 만큼 권환의 문학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네.

갑 : 그런데 권환은 워낙 다양한 장르의 글을 많이 남겼지 않나. 아까도 볼셰비키 프로문학론에 대해 얘기하면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평론의 경우 도식적이고 기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 않나. 단적으로 권환은 <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중외일보 1930. 9. 3)에서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10개 항목으로 나열했는데, 이는 같은 해 7월에 나온 일본 나프(NAPF,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의 <예술대중화에 관한 결의>에서 제재 대상으로 삼은 10개 항목과 거의 동일한 것(≪일본프로문학과 한국문학≫, 임규찬, 연구사, 1987)이었지. 결국 권환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소장파들의 공통된 오류이기는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국제성에 기인된 것”(이덕화, 앞의 논문)이었네. 프로문학이 미학과 정치학을 혼동해 예술의 자율성을 부인하고 정치투쟁이나 경제투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 않나. “현실에 대한 극히 단순하고도 피상적 이해를 보여준다”(이덕화, 앞의 논문)는 지적이나, “이러한 평론들은 굳이 권환이 아니어도 별로 상관없는 것이라 하겠지요”(김윤식, 앞의 글)라는 지적도 있었지.
을 :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런 얘기도 나올 법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환의 위상에 달라지는 건 아닐세. 당시 카프는 러시아의 라프(RAPP, 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협회)나 나프 등을 통해 유입되었고 그 영향 아래 있었던 점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지. 1930년 11월 6일부터 15일까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서 열린 ‘프롤레타리아 혁명작가 제2회 국제대회’ 이후 박태원이 미국 프로문학잡지 <New Masses>에 게재된 글을 신문에 번역, 소개하고 권환도 일본 나프의 움직임을 발빠르게 소개하는 글을 실는 등의 활동이 주목을 받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 결과 우리 문학사에서 ‘농민문학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지.

갑 :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있겠지.
을 : 그럼. 정재찬은 노동 대중을 기반으로 확고한 볼셰비키적 방침을 내세우면서 아지프로를 목적으로 한 개념적 교술적 서술시 양식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고, 당시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써 권환의 면모가 부각된다(<시와 정치의 긴장관계-시인 권환론>, ≪한국현대리얼리즘시인론≫, 태학사, 1990)고 평가했지. 또 김윤식은 권환만이 ‘운동으로서의 문학’ 범주를 시 장르에서 계속 유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김윤식, 앞의 글)고 했네. 이장렬은 권환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특이한 몫을 차지하는 이라며, 그 이유를 우리 문학사에서 계급강령에 맞추어 문학성을 확보하는 것이 미학이었던 카프 안에서 이를 철저히 지켜냈기 때문(<권환 연구의 놓인 자리와 연구방향>, 경남어문논집, 2000)이라고 했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문학을 사회로 확대시키는데 디딤돌을 마련한 점에서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될 자산임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지.

갑 : 그런데 말일세, 난 솔직히 평론은 잘 모르겠고 관심도 별로 없어서 꼼꼼히 챙겨 읽어보지는 못 했네. 내가 수필을 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설에 관심이 가더라고. 그래, 권환의 소설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몰라도, 솔직히 실망했네. 단박에 읽어 보아도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더란 말이야.
을 : 뭐, 사실 그 점 때문에 지금껏 소외 당해온 측면도 있기는 하지. 하지만 소설 <목화와 콩>은 식민지 시대 농민소설로는 드물게 식민지 농업정책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담고 있어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었지. 임화는 “제재에 잇서서나 또 그 소박간결한 형식에 잇서서나 조선의 농민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엇스며 또한 조선의 문학형식에 잇서서 전혀 다른 엇던 것을 보이고 잇섯다”(<1931년간의 캅프예술운동의 전황>, 중앙일보, 1931. 12. 11)고 높이 평가한 작품일세. 이갑기는 “최근에 어더 보지 못할 만한 걸작”(<예술운동의 전망>, ≪비판≫, 1932. 1월호)이라고 극찬했던 작품인데.

갑 : 나도 알고 있네. 다른 작품에 비해 <목화와 콩>이 그중 나았던 건 사실이네. 그런데 주인공 필성의 행동이 “구체적 성장과정이나 구체적 묘사가 빠져있는 관계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어도 다분히 추상적인 작가의 작위적인 노력에 의해 지식인적 계몽성을 보여”(김종호, 앞의 논문)주고 있어 안타까웠네. 전체적으로 묘사는 간략하게 처리되고 목적의식을 전달하는데 치우쳐 소설적 형상화에 소홀한 측면을 드러내고 만 것 같더군. “더구나 당국과 농민의 싸움 역시 실로 유치한 수준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 및 후일담까지 곁들여 있는 것을 보면 그 정도의 얕음이 한눈에 들어온다”(김윤식, 앞의 글)는 혹평도 있었지.
을 : 하지만 “다분히 감정적인 측면에 머무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집단의식의 성장은 이전의 농민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김종호, 앞의 논문)이었음도 분명한 사실이지.

갑 : 실망스럽기는 희곡도 마찬가지였네. <광!>이나 <아버지> 등이 짧은 공연시간으로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다루기에 난관이 많아 보였네. “계급적 집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대신 ‘가족’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져 보”(<권환 희곡 연구>, 김재석, 시와비평 제8호, 2004)이는데, 구성으로 볼 때 매우 허술한 게 사실이네.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작은 이야기 한 토막을 줄거리로 한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며, 인물의 성격 제시, 극적인 동기 부여 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밋밋하게 짜여 있다”(황선열, 앞의 글)는 지적도 있지. 무엇보다 평론이나 소설, “시에서는 뚜렷하게 (볼셰비키 문학론의 입장에서)계급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에 비해 희곡에서는 그렇지 않다”(김재석, 앞의 글)는 의외의 차이점이 발견된 장르이기도 하지.
을 : 연극 “공연이 주로 당대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경찰을 동원해 탄압하곤 하였”으므로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극적 장치들을 제대로 구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김재석, 앞의 글) 아니었겠는가. 권환이 두 번째로 검거된 <신건설사> 사건의 경우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들이 전주에서 공연한 레마르크 원작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예의 주시하던 일제가 공산주의협의회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결국 카프가 해산하는 결과를 낳았지 않은가. 권환이 카프 해소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없었지. 카프는 연극 특유의 ‘교화적 기능’에 주목해 연극에 공을 들였고, 그럴수록 일제의 검열은 심해진 것이지.

갑 : 아동문학도 있더군.
을 : 응, 소년소설 4편과 동시 3편 등이 최근 발견되었어. 주로 당시 가난 체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거나 일본 군국주의 아래에 놓인 겨레의 아픈 현실을 담아냈어. “아직 논리적 틀을 분명히 갖춘 것은 아니나, 계급주의자로 발전되어가고 있는 밑바탕”(<권환 문학 연구>, 이장렬, 경남대 박사논문, 2003)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야.

갑 : 어쨌든 권환의 작품은 시를 중심으로 살피는 게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아마도 볼셰비키 문학론의 관점에서 노동 대중을 아지프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르가 시이기 때문에 권환 자신도 다른 장르보다 시에 더 집중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을 : 맞아, 그건 사실이지.

 

아름다운 평등 상세보기
권환 지음 | 전망 펴냄
31년 카프 제2차 방향전환 중심인물이었으며 54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시인 권환(본명 권경완)의 문학 전반을 조감할 수 있는 전집. 발표순으로 정리한 시와 소설, 희곡, 평론과 산문을 통해 88년 해금 이후 여전히 우리 시야 밖에 머물던 시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